▲철학=점술?서울 성북구 미아리의 점집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철학이 사라진 시대다. 구시대의 유물로 도서관의 한 자락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자신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이 상갓집 개 취급을 받는다고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다. 철학이 퇴물 취급받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철학은 지적 허영만 충족시켜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무지 어렵다. 그렇다고 지적 허영을 온전하게 충족시켜주지도 않는다.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주려면 다른 사람에게 과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철학은 그것이 쉽지 않다. 사교의 장에서 지적 허영을 뽐내기 위해 철학을 들먹였다간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 잘난 척만 한다고 왕따당하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관심사와는 너무 무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무시당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철학이란 뜬 구름 잡는 것'이란 생각은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뿌리 깊고 오래된 생각이다. 모든 '서양철학사' 책에서 철학의 시조로 탈레스를 지목한다.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탈레스에 대해 체계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후대의 철학자들이 탈레스에 대한 몇 가지 일화만을 자신의 책에 소개했을 뿐이다. 그렇게 소개된 일화 중 이런 것도 있다.
탈레스는 하늘의 별보기를 즐겨했다. 어느 날 별을 보며 걷다가 발 밑에 있는 우물을 보지 못하고 그만 빠지고 만다. 옆에서 이를 지켜 본 트리키아인 여인이 탈레스를 놀렸다. 탈레스는 하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코 앞에 있고 발 밑에 있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탈레스는 저 멀리 하늘의 별자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지만, 정작 중요한 발밑의 우물은 모른다는 놀림이다. 탈레스에 대한 이 놀림은 철학에 대한 놀림이기도 하다. 최초의 철학자에 대한 최초의 놀림은 철학을 향한 대표적인 놀림이 되었다. 저 멀리 있는 구름 위의 세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박식하지만,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비판이다. 철학은 현실과 무관하다는 놀림이다.
철학의 뒷모습철학은 자만에 빠져 스스로가 만학의 근원이라고 잘난 척은 하지만 실제 잘난 것도 없다. 철학이 무엇인지조차 철학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철학입문서는 철학의 어원을 분석한다.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검색해 봐도 철학의 어원을 분석한다. 철학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철학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변명하기 위해서다.
날고 긴다는 쟁쟁한 철학자들이 철학의 정체를 밝히고자 노력은 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만의 철학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 오랜 역사 동안 그렇게 위대한 철학자들이 철학의 정체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철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철학자마다 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달라, 쌓이면 쌓일수록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다.
난 이 글에서 철학의 어원을 분석하지는 않겠다. 철학의 어원은 인터넷 사이트만 검색해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철학이 무엇이라고 나만의 철학 체계를 구축하지도 못한다. 내 주제에 감히 위대한 철학자의 대열에 겁 없이 뛰어들고 싶지도 않다. 나름대로 주제파악은 하고 있는 셈이다.
난 단지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할 때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럼 점 볼 줄 알아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과거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철학이랑 점보는 것은 별로 관계가 없는데요."
점 보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주역'이라는 것. 그러나 주역은 사실 점보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것. 주역은 음·양과 8괘를 기본으로 우주의 변화·발전을 설명한다는 것. 주역은 우주에 대한 세계관을 담고 있는 형이상학이라는 것. 뭐 이런 것들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다. 이쯤 되면 대화의 분위기는 싸늘해진다. 예전에 종종 진행됐던 대화의 유형이다. 요즘은 이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냥 점을 봐줘버린다. 철학이 점보는 것과 무관하다고 설명했다고 한들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점을 봐준 후 나폴레옹에 관한 야사를 이야기한다. 글로 기록된 야사도 아니라 입으로 구전된 야사다. 프랑스에서 전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야사가 역사적 거짓일지라도 어떤 진실을 담고 있으면 그만이다. 사실 곰이 100일 동안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더라도 어떤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면 곰의 이야기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에 관한 야사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다. 나폴레옹은 원정을 앞두고 점을 치는 산파를 찾아가 손금을 봤다. 산파는 이야기한다. 손금이 너무 좋다. 그런데 중간의 한 부분이 끊어져 있다. 그 끊어진 부분 때문에 원정은 실패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폴레옹은 결연한 의지로 칼을 뽑아 손금의 끊어진 부분을 그어 버렸다. 끊어진 손금을 칼에 베인 상처로 이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홀연히 원정을 떠났다. 그렇게 그는 알프스를 넘었다.
인간에게 운명이란 것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설령 운명이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점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운명이란 것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운명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의지라는 것이다. 손금을 칼로 째는 결연한 의지에 의해 운명이란 것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삶과 운명의 주인은 그 무엇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은 단순히 점을 보는 것이 아니다. 혹은 점보는 것과 철학은 무관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점의 의미를 묻는다. 점을 통해 드러난다는 운명이란 것의 의미를 묻는다.
속세에서 철학하기어린 시절 '눈'이 오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이유는 없다. 어쩌면 영화 <러브 스토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그 때도 겨울이었다.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달동네 철거촌에 간 적이 있다.
달동네 철거촌의 삶은 힘겨웠다. 거기에 겨울이 오고 눈까지 오면 힘겨움은 더해간다. 추운 겨울밤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눈 쌓인 달동네의 오르막길을 미끄러지며 올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어붙은 빙판길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현실이라는 것을…. 연탄이 떨어져 냉방에서 밤새 떨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철거촌에 낭만은 사치란 것을…. 달동네 철거촌에 다녀온 후 나는 눈을 싫어하게 되었다. 눈을 보면 철거촌의 힘겨움이 떠올랐다. 눈이 오지 않기를 기원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주변에 귀농하는 사람이 생겼다. 귀농한 친구들과의 관계는 농업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농활에서 느낀 농촌과는 또 다른 인식이다. 지구 온난화로 겨울 가뭄이 일반화되고 있다. 겨울 가뭄은 눈이 오면 해결된다. 눈이 많이 온 해에는 풍년이 들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너무나 힘겨운 농업의 현실에서 눈으로 겨울 가뭄이나마 해갈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제는 다시 눈을 기원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눈'을 좋아했다.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 나는 '눈'을 싫어했다. 달동네 철거촌의 힘겨운 삶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눈'이 많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어려운 농촌현실이 풍년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눈'에 대한 생각은 계속 변해왔다.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다. 그러나 '눈'이 달라져서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눈'이나, 대학 다닐 때의 '눈'이 다른 것은 아니다. 대학 다닐 때의 '눈'과 지금의 '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지금의 '눈'과 미래의 '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눈' 자체가 아니라 '눈'에 대한 나의 관점일 뿐이다. 달라지는 '눈'에 대한 관점에 의해 겨울을 살아가는 나의 삶이 달라진다. '눈'에 대한 관점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결정된다. 세계관에서 결정된다. 철학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생각에 의해 다르게 행동한다. 운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운명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운명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려 할 것이다. 세상이 고정불변하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적응하려할 것이다. 세상이 변화한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바꾸려할 것이다.
다르게 행동하면 결과도 대부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세상에 적응하는 것과 세상을 바꾸려는 것은 결과가 다를 것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이고 모여 한 사람의 삶이 된다.
사람들은 다른 생각에 의해 다르게 행동한다고 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여 삶이 된다고도 했다. 결국 다른 생각에 의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삶을 만들게 된다. 다른 철학이 다른 삶을 만들게 된다.
덧붙이는 글 | * 본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사이트 이스트플랫폼(http://www.epl.or.kr)에 공동 게재됩니다.
** 2008년 초에 민연사에서 출판할 예정인 책의 내용을 연재 기사로 묶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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