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여행을 떠나지만

[시 더듬더듬 읽기 65]만추에 읽는 박라연의 시 '가을 화엄사'

등록 2007.11.07 14:24수정 2007.11.0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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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엄사의 가을 풍경(2005.10.27). ⓒ 안병기

지리산 화엄사의 가을 풍경(2005.10.27). ⓒ 안병기

지리산 화엄사와 무전여행의 추억

 

1980년대 초 난 거의 일 년에 가까운 무전여행을 했다. 그 일을 두고 나를 아는 누군가는 방황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모색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방황과 모색, 그 어느 쪽도 내 의중을 꿰뚫는 말은 아니었다.  장성 백양사 원주의 말처럼 차라리 '자학'이라고 규정하는 편이 훨씬 솔직할는지 모른다. 지금에 와서 보면,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 기록들을 차근차근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기록은 잃어버린데다 기록을 대신할 기억은 알코올이 뇌 세포를 철저하게 해킹해서 완전 삭제해 버린 것을 어이하랴.

 

1981년 5월, 아침 일찍 동리산 태안사를 떠나 구례 화엄사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친구가 섬진강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잔뜩 설레발치던 압록에 도착했다. 냇가에다 배낭을 내려 놓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올갱이라 부르고 전라도 사람들은 대사리라 부르는 다슬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남도 사람들은 다슬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어릴 적 고향에서 배우고 익혔던 다슬기 잡던 솜씨를 발휘해서 그것으로 점심과 바꿔 먹을 요량이었다.

 

우리 고향 마을 괸들 옆으로는 환벽당 앞 창계천으로부터 흘러오는 시냇물이 있었다.  더위에 지친 여름밤이면, 마을 사람들은 바위와 돌멩이에 시커멓게 달라붙은 다슬기를 잡으려고 시냇가로 나갔다. 저마다 독립군처럼 솜뭉치에 석유를 묻혀 불붙인 횃불을 쳐들고서.

 

다슬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는 저녁 무렵이다. 다슬기는 모래 속에 깊이 박혀 자폐의 시간을 즐긴다. 그러나 제아무리 자폐를 즐기는 다슬기라 할지라도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더는 참지 못하고, 오후 5시가 넘으면 밖으로 슬슬 마실을 나온다. 이윽고 칠흑같이 깜깜해지면, 다슬기는 세상이 온통 제 '나와바리'인양 돌아다닌다. 그래서 다슬기를 잡으려면 밤에 횃불을 켜고서 잡는 게 가장 수월하다.

 

그렇게 잡은 다슬기는 곧바로 적당히 된장을 풀고 나서 한 소금 다글 다글 끓인다. 그리고 희미하게 램프가 켜진 툇마루에 앉아 일삼아 까먹는 거다. 다슬기 꽁무니를 이빨로 살짝 깨트리고 나서 입으로 쭉 빨면 다슬기의 보드라운 수육이 입안으로 쏙 들어온다. 때로는 탱자나무 가시로 빼먹을 때도 있다.  다슬기 맛은 고소하면서도 약간은 씁쓸한 맛이 겹쳐진 '모순의 맛'이다.

 

램프에는 각다귀, 하루살이, 박각시 등이 날아와  아수라를 이루고, 반바지 아래 드러난 종아리에선 모기들이 사돈네 팔촌까지 다 불러다 놓고 회식을 진행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나의 다슬기 까먹기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 다슬기 까먹던 여름밤의 추억을 빼놓고 어떻게 고향을 추억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 잠시 그리움이 담겼다가 저만치 흘러간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다슬기라고 해서 다 같은 다슬기가 아니다. 암다슬기는 통통하고 숫다슬기는 길쭉하다. 얕은 물에서 잡은 다슬기는 연한 고동색을 띠지만 깊은 물에서 잡은 것은 껍질이 두껍고 거무튀튀하다. 그리고 끓여놓으면 국물맛이 영 아니다. 압록의 다슬기가 그랬다. 그러나 할 수 없지 않은가. 이거라도 감지덕지지. 삽시간에 잡은 다슬기의 양이 꽤 되었다. 이만하면 족히 밥 한 그릇과 바꿔 먹을 만하다 싶었다. 

 

구례구를 지나 구례읍의 한 식당에서 다슬기를 주고 점심을 해결했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저물기 전에 화엄사까지 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걷기엔 너무 먼 거리를 걸어온 탓인지 제대로 발조차 뗄 수 없다. 그럭저럭 화엄사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었으며 일주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절집에서 숙식을 해결해 온 내게 이런 경우는 일종의 '변괴'나 다를 바 없었다.

 

할 수 없이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탁구대가 있다. 궁즉통이라더니, 배낭을 벼개 삼아 탁구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불이 켜진 공원사무실 안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직원 4명이 고스톱에 한창 열을 내고 있었다. 당시엔 고스톱도 국립공원 관리 업무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스르르 잠이 들려는 찰나. 고스톱 업무에서 소외된 한 사나이가 그 틈에 방뇨의 희열이나 만끽하려고 밖으로 나오다가 나를 발견했다. 이 양반, 주장자도 들지 않은 채 대뜸 "할!" 대성 일갈을 터뜨린다.

 

"여기에서 잠자면 안 됩니다. 여긴 숙박 업소가 아녀요!"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으면서 "여기서라도 그냥 잘 수 있게 해달라"라고 통사정했다. 그랬더니 "정 그렇다면 요 위에 지장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거기 한번 가보라"라고 한다. 청천하늘에는 잔 별도 많고 우리네 세상엔 잠잘 곳도 참 많네.

 

용기백배하여 지장암을 향해 컴컴한 산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는 게 아닌가. 그에게 지장암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자기도 마침 그리고 가는 길이니 따라오라 한다.

 

지장암은 비구니들만 있는 절집이었다. 방안으로 들자 주지 스님은 "저녁공양은 했느냐?"라고 물었다. 배가 몹시 고팠지만 밤 11시를 훨씬 넘긴 시각에 밥 차리는 수고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더니 스님은 벽장 속에서 초코파이 10개를 꺼내주셨다.

 

나와 잠시 길동무한 사내는 주지 스님의 아들이었다. 서울에서 의사 노릇을 한다는 그는  한복을 차려입었는데 도인의 풍모가 역력했다. 내게 성남에 있는 '기원정사'로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마도 불교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발바닥이 온통 곪아버려 도저히 방바닥을 딛고 설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벽을 붙들고라도 일어서려고 몇 번이고 이를 악문 채 몸부림을 쳤다. 하다못해 빗자루로 절마당이라도 쓸고 나서 밥을 얻어먹어야 할 것 아닌가. 몇차례 시도 끝에야 난 겨우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곧장 배낭을 걸쳐 메었다. 주지 스님이 황송스럽게도 김밥을 싸주셨다. 그리곤 "더 드리고 싶지만 처사님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라며 돈 만 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노고단으로 오르기 전에 화엄사에 먼저 들렀다. 경내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각황전과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네 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는 삼층석탑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마간산 격으로 화엄사를 들여다보고 나서 노고단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새 발바닥의 고름들이 다 터져버렸는지 아침보다는 훨씬 걷기가 편했다.

 

맺힌 그리움을 푸는데도 알맞은 시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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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표지. ⓒ 문학과 지성사

시집 표지. ⓒ 문학과 지성사
재작년 10월 말 1박 2일 동안의 지리산 '종주'를 끝내고 남원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대구에서 온 아우와 만나 하룻밤을 잔 다음, 그와 함께 화엄사에 들렀다. 주변의 산색이 가을빛으로 장엄했다. 더 커지고, 더 화려해진 전각들. 내 기억 속의 화엄사는 어디로 흘러가 버렸는가.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 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박라연 시 '가을 화엄사' 전문 《<생밤 까주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 1993》

 

박라연의 시 '가을 화엄사'를 생각했다. 나 역시 시인처럼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 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 때나 되는 것이 아니라, 맺힌 그리움을 푸는데도 시절이 있다. 적당한 시기가 있다.

 

하지만 내 그리움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던 첫사랑의 처녀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났을 때, 되바라질 대로 되바라진 여자의 모습에 "내가 여기 왜 왔던가?"하고 가슴을 찧으면서 되돌아서는 사내처럼 후회스러웠다. 

 

마음이 무겁거든 가벼운 풍경을 택할 것


어쩌면 시인은 여행 장소를 잘못 고른 것인지 모른다. 화엄사는 저 자신의 몸무게가 너무 무겁다. 저 자신부터 버리고 싶지만, 그냥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화엄사가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것이 화엄사 혹은 화엄사 부처님이 가진 통찰력이라 믿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까닭은 어쩌면 화엄사 자신이 겪고 있는 무거움과 그 무거움을 앓는 동병상련의 심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도 삶이 그리 무겁더냐? 나도 이처럼 삶이 무겁구나.

 

화엄사에 가시거든, 한 번 차근차근 둘러보라. 화엄사에 전각과 석탑이 오죽 많은가. 각황전, 대웅전, 원통전 등 전각은 물론 사사자 삼층석탑, 원통전 앞 사자탑, 동·서 오층석탑과 석등 등등 화엄사는 '무거움'으로 가득차 있다. "너무 무거워서"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간다면 화엄사보다는 동리산 태안사가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화엄사와 가까운 전남 보성이 고향인 시인에게 나의 이런 진술이 자칫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경우가 될는지도 모르지만.

 

시인의 마음이 무거운 탓일까. 화엄사에선 낙엽까지 무겁다.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신발 바닥에 달라붙은 낙엽은 영 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라고 묻는다. 아니, 이것은 물음이 아니라 독백이다.

 

묻기 전에 시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제아무리 무생물일지라도 나뭇잎에도 삶의 고뇌가 있을는지 누가 아는가. 삶이라는 "부스럼 딱지들"을 붙이고 있는 게 인간뿐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재작년, 나는 지리산 '종주'도 했고,  화엄사에도 다녀왔지만 여행기는 쓰지 못했다. 천성이 게으른 탓이다. 굳이 변명을 보태자면,  여행기를 쓸 수 없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아름답고 거대한 풍경에 압도당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너무 많이 변해버린 풍경에서 환멸을 씹게 되는 경우이다. 나의 지리산 여행기가 불발한 까닭은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경우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쯤 지리산에 다녀오려고 한다. 지장암에도 들리고. 그때는 지리산의 거대한 풍경을 내 마음속에서 삭혀내 오롯히 내 정신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다. 너무 늦게 찾아가느니 차라리 망각 속에 던져두는 것이 낫다. 무엇인가 " 떨어뜨리고 싶은 것"이 있거나 혹은 잊고 싶은 것이 있거든 자신보다 가벼워 보이는 곳으로 떠나라. 애써 찾아간 풍경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도록 말이다. 

2007.11.07 14:24 ⓒ 2007 OhmyNews
#지리산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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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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