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단편선 책 안에 쓰여있던 글수능 시험을 마치고 나와 선물 받은 책. 그 안에 쓰여있던 글
송선영
수능을 마치고 나온 나에게 기자 아저씨는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셨다. 바로 <톨스토이 단편선>이었다. 책 앞에는 수고했다는 격려가 담긴 따뜻한 위로의 글귀도 함께 적혀 있었다.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아직도 글로 표현하기에 참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당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신문의 청소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고3 일기를 연재했다. 2주에 한 번 고3 일기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신문을 보고 멀리 살고 계신 고모부께서도 이메일을 주셨고 심지어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까지도 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그 어린 학생, 지금 고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수험장을 빠져나올 즈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고 해가 지고 있을 그 무렵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가장 먼저 아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다정다감하지 않은 우리 아빠의 전화 첫 마디는 "아빠야∼"라는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막내딸이지만 부모님께 애교 섞인 말 한번 남기지 않은 무뚝뚝한 나와 더 무뚝뚝한 아빠 사이에는 따뜻한 말이라고는 평소에 찾아볼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아빠가, 그랬던 나의 아빠가 이렇게 따스하게 남겨주는 이 한 마디에 난 눈물이 나왔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뭉클함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수험표 뒤에 적어온 나의 답과 수능 정답을 맞혀봤고 이때 딱 한번 눈물을 흘려봤다. 시험에 대해 워낙 무덤덤한 나의 성격인지라 아니나 다를까 이때를 제외하고 수능에 대해 걱정해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평소보다 수능을 못 본 것만은 확실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태평한 나의 모습에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 바탕 듣기도 했지만 아주 잠시 동안은 고3 수험생에서 해방되었다는 자유를 느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다.
수능을 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행복하게 맞춰지고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수능 본 다음날, 학교에서는 가채점한 결과를 적어서 제출하라고 학생들에게 알렸고, 이에 반발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채점 결과를 200점으로 적어서 냈다(우리 때 수능 만점은 400점이었다).
수능 본 다음날, 맞바로 학생들에게 가채점 결과를 적어서 내라고 하는 학교 측의 매몰찬 행동에 우리 나름대로 선택한 반항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소심한 선택임은 분명한 것 같다.
수능을 본 뒤, 친구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재수를 결심한 듯 무언가 결의에 차 있는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 친구도 있었고, 많이 떨어진 수능 점수를 암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펑펑 우는 친구도 있었고, '본인의 수능 점수에 맞춰 갈 수 있는 대학이 있기나 하냐'며 한숨 쉬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런 고민과 눈물 섞인 투정도 아주 잠깐이었다. 모두 형편에 맞게 대학 원서를 썼고 그들 나름대로 앞길을 계획해 나갔다. 운전면허를 따러 분주히 움직이는가 하면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원서를 쓸 때 정말이지 울면서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이었기에 후회는 없었지만 억울한 마음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내 의지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나의 점수보다 조금 낮게 대학교 원서를 넣었고, 덕분에 많은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입학했다. 아주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정말 인생은 생각한 것처럼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는 럭비공과도 같은 것 같다.
수능을 다 본 뒤 학교를 나서면 무척이나 시원하고 훌훌 날아갈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때를 기점으로 세상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이 더욱더 커지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수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선택해야 하고 원서를 써야 하고 모든 대학 일정을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했기에 수능 본 이후, 부쩍 학생이 아닌 일반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종종 느끼곤 했다.
지금 수능을 앞둔 친구들이 이 글을 읽게 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멀리서나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전국의 수험생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비록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수능 시험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남몰래 숨어서 울어야 했던 그 숱한 나날들이 언젠간 그대들의 인생에 주춧돌이 되어 더 멋진 인생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위민넷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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