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보석'이라더니, 여기에 무기 박는다고?"

[2007 제주평화축제] 길 위의 신부, 제주도를 걷다

등록 2007.11.12 12:41수정 2007.11.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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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현 신부가 한 주민의 얘기를 유심히 듣고 있다.
문정현 신부가 한 주민의 얘기를 유심히 듣고 있다.이주빈

사람들은 그를 '길 위의 신부'라고 부릅니다. 그는 늘 길 위에 서있었습니다. 평택 대추리에서, 부안 새만금에서, 군산 미군기지 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절규하는 그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아왔습니다.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그가 이번엔 제주도 강정마을 해안에 서있습니다. 강정마을은 국방부가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국회에 예산안을 상정한 곳입니다. 물론 주민들은 강력히 저항하고 있구요.

그는 길에서 대화를 합니다. 대화상대는 나이든 사람, 젊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11일 서근도 앞에 선 문 신부가 양홍찬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과 얘기를 나눕니다. '평화 걷기대회'에 참석한 이들도 귀를 엽니다.

"요 옆에 있는 콘도 하나 지을 때도 마을 총회를 여덟 번 했습니다. 그런데 콘도보다 더 한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데 기습적으로 딱 한 차례 하고 끝내버렸습니다. 그것도 자기들 입맛에 맞는 주민들만 동원해서요. 말 그대로 군사작전처럼 해버리더군요."

"평택 대추리도 그랬어, 주민 한 명도 참석 안 했는데 설명회 했다고 사진 찍고…. 다 그게 자기들 뜻대로 군사기지 만들려고 하는 술책이지. 토지주가 270명이나 되는데 8명 모아놓고 주민공청회 열어서 주민동의 얻었다고 밀어붙이더라고."

길 위에 신부, 이번에 제주도 길 위에 서다

 문 신부와 양홍찬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이 바닷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 신부와 양홍찬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이 바닷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이주빈

두 사람은 한동안 제주 바다만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다 불쑥 문 신부가 말을 던집니다.


"반대해야 마땅하지, 암. 국방부는 저 아름다운 바다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그것도 관광자원이라고 했다면서요? 말이 되나, 그게 어떻게 관광자원이야? 괴물이지. 여기다 군사기지 만들면 신혼부부는 어디로 가? 제주도로 전쟁 놀음 구경하러 오는 신혼부부가 있겠냐고."

"대통령이 자기 입으로 '제주도는 평화의 섬'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되니까 자기 입으로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 말하면서 군사기지 만들고, 보석 한 가운데 무기 박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도 강정마을 오니까 든든해, 젊은 사람도 많고. 대추리·도두리에선 내가 끝에서 두 번째였어, 하하. 평택 생각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져. 세 번씩이나 쫓겨났거든. 힘들게 만들어 놓은 논 285만평을 고스란히 빼앗겨버렸고…."

"열 받을 만 했겠네요. 자기가 일군 땅을 미군기지로 뺏겨버렸으니. 저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그 후엔 바로 공군기지가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3개 함대가 주둔할 수 있는 기지인데 해군·공군 합동작전이 현대전의 기본이잖습니까. 최선을 다해 주민들과 막아볼 생각입니다."

그가 다시 절뚝이는 걸음으로 '평화 걷기대회'에 참석한 이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잠시 후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또 다른 이가 나타나 문 신부에게 말을 붙입니다. 귀찮은 기색을 할 법도 한데 그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다시 대화를 합니다. 

 평화유랑을 계속하기 위해 군산으로 돌아가는 문 신부. 강정마을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안부인사를 건넸다.
평화유랑을 계속하기 위해 군산으로 돌아가는 문 신부. 강정마을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안부인사를 건넸다.이주빈

 문 신부가 주민이 준 밀감을 까고 있다.
문 신부가 주민이 준 밀감을 까고 있다.이주빈

일흔의 노구, 그가 쓰러지지 않는 까닭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것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면 30초 안에 얼굴에 웃음꽃을 피웁니다. 아무리 사안이 심각해도 말입니다. 그 복잡한 애기를 하며 웃을 수 있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길 위의 신부'가 가진 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웃음이 되어 대추리를, 새만금을 오갔겠지요. 

하지만 그가 늘 '심각한 대화'만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건넨 밀감을 맛있게 까먹기도 하고,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이곳저곳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또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한 기자에게 자기는 예약표가 있다며 은근히 약을 올리기도 합니다. 

미군기지 문제로 평화유랑을 하고 있는 군산으로 돌아가겠다며 그가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넵니다. 여기저기서 아쉬워하는 목소리와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들이 쏟아집니다. 그가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화답합니다.

"걱정들 말아요, 이 땅에 미군기지가 있는 한 난 쓰러지지 않으니까. 하하하."

발걸음 돌리던 그가 강정마을 평화벽화 한 귀퉁이에 몇 자 새깁니다.

"강정, 생명평화 마을.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그가 이같은 방명록을 더 이상 쓰지 않는 날, 그가 더 이상 길 위에 서있지 않는 날. 바로 그 날이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든 날이겠지요. 아마 그 날은 제주도 사람들이 밝게 감탄하는 바로 그 날이겠지요.

"오늘 일기 촘 좋수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

 문 신부가 제주도 강정마을 평화벽화 한 귀퉁이에 서명을 남겼다.
문 신부가 제주도 강정마을 평화벽화 한 귀퉁이에 서명을 남겼다.이주빈

#제주도 #해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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