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첫눈이 내리던 밤에...

등록 2007.11.20 13:47수정 2007.11.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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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9일) 밤 9시 뉴스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각 딩동~!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음, “누구지~?”, “지금 눈 와여~~ 펑펑” 앞 동에 사는 조카가 보낸 메시지였다.


얼른 베란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첫눈치고는 꽤 많은 양의 눈이 바람결을 따라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어진다. 때마침 버스정류장으로 마중을 나오라는 남편의 전화가 왔다. 잘 됐다 싶어 우산을 챙겨들고 한껏 들뜬 기분으로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을 땐 괜스레 기분이 좋아 동요를 흥얼거려 본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 발자국 소복소복
도련님 따라서 새벽길 갔나
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 발자국
겨울해 다가도록 혼자 남았네


차 위에도 나뭇가지에도 도로도 온통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미처 월동 장구를 갖추지 못한 차들이 엉금엉금 느린 속도로 지나간다. 갑자기 마술을 부린 듯 펼쳐진 겨울풍경에 아직 잎을 떨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가을도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듯한 잎 한 잎 떨어내고 있다.


 머뭇거리던 가을도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듯 한 잎 한 잎 떨어내고 있다.
머뭇거리던 가을도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듯 한 잎 한 잎 떨어내고 있다.김정애

강아지처럼 좋아라 뛰어나온 개구쟁이들이 추운 줄도 모르고 눈을 굴리고 있다.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정도로 커다란 눈덩이를 눈사람으로 만들려고 끙끙거리며 몸통 위에 머리를 올리려 하지만 역부족,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거들어 주려다 그만 떨어뜨리는 바람에 애써 굴린 눈덩이는 부서지고 덩그러니 몸통만 남아 있는 미완성 눈사람을 안타까운 듯 바라본다.

  둘이 끙끙거리며 들어보려 하지만 잔뜩 물을 먹은 눈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꿈쩍도 하질 않는다.
둘이 끙끙거리며 들어보려 하지만 잔뜩 물을 먹은 눈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꿈쩍도 하질 않는다. 김정애

슈퍼 앞 너른 공간에 우뚝 선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나무가 눈을 맞더니 생명을 되찾은 듯 생기가 넘친다. 오색의 꼬마전구만 두른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유난히 자전거를 좋아하는 내 눈에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혼자 겨울을 즐기고 있는 자전거가 포착됐다.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나무가 눈을 맞더니 생명을 되찾은 듯 생기가 넘친다.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나무가 눈을 맞더니 생명을 되찾은 듯 생기가 넘친다.김정애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혼자 겨울을 즐기고 있는 자전거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혼자 겨울을 즐기고 있는 자전거김정애

우산도 남편 손에 맡기고 첫눈이 가져 온 겨울 정취에 흠뻑 취해 한참을 사진 찍느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나를 저만치 서서 바라보던 남편이 이제 그만 들어가자며 부른다. 머리 위에도 어깨에도 소복이 내려앉은 눈,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언젠가 성당에서 본 하얀 레이스 천의 미사 보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아 출근길을 걱정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남편을 배웅하고 16층에서 내려다본 아침풍경은 두툼한 겨울옷차림의 행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오가고 멀리 보이는 눈 덮인 겨울 산이 아침 햇살에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우려와는 달리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아침이다.
#첫눈 #낙엽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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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52세 주부입니다. 아직은 다듬어진 글이 아니라 여러분께 내놓기가 쑥스럽지만 좀 더 갈고 닦아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들 수 있는 혼이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특히 사는이야기나 인물 여행정보에 대한 글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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