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제 눈에서 어둠이 보여요?"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는 푸른 색이다

등록 2007.12.06 11:17수정 2007.12.0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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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중마고 아이들과 박효수 선생님  혹시라도 초청작가 앞에서 흐트러진 행동이나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잔소리(?)를 늘어놓고 계시는 박효수(국어)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의 노파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강의 시간 내내 진지하기만 했던 중마고 아이들.

중마고 아이들과 박효수 선생님 혹시라도 초청작가 앞에서 흐트러진 행동이나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잔소리(?)를 늘어놓고 계시는 박효수(국어)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의 노파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강의 시간 내내 진지하기만 했던 중마고 아이들. ⓒ 안준철


지난 11월 28일, 동광양시에 위치한 중마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 꿈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저를 만난 아이들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책을 쓴 저자를 직접 만나 강의도 듣고, 직접 사인을 한 책도 선물 받고, 사랑방처럼 아늑한 도서관 국어과 교실에서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해맑은 아이들 앞에서 시와 삶을 얘기한 그 작가가 바로 저 자신이라는 사실이 저로서는 꿈같은 일이었고요.

아이들을 만나면 무슨 얘기부터 꺼낼까? 사실은 그것이 걱정이긴 했습니다. 영상시대에 사는 아이들 앞에서 문학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역스러운 일인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선생님이 전하는 시 한 구절에 눈망울을 반짝이던 순수의 시대는 이미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일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날 그런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간 것은 참으로 통쾌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지요.

a 호기심이 가득한 귀여운 아이들  강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금세 친한 사이가 돼버렸다.

호기심이 가득한 귀여운 아이들 강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금세 친한 사이가 돼버렸다. ⓒ 안준철


아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신 박효수 선생님의 노파심 어린 잔소리(?)가 길어지는 동안, 저는 앞자리에 앉은 두세 명의 여학생들과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다가 금세 친한 동무 사이가 돼버렸습니다. 여학생 특유의 호기심 어린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얼마만인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그러다가 한 남학생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는 할 수만 있다면 흐르는 시간을 멈추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선생님, 제 눈에서 어둠이 보여요?”

어둠은커녕, 눈웃음치는 아이의 눈에서는 환희의 봄빛이 넘실대고 있었기에 저는 안심을 하고 웃음 띤 얼굴로 아이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았습니다. 남자 아이치고는 속눈썹이 길어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웃는 얼굴조차 슬퍼 보이기도 했습니다. 맑은 슬픔이랄까?


어쨌거나 그 아이로 인해 뭔가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준비해간 강의 내용을 잠시 뒤로 미루고 기형도 시인의 시 한 구절을 급히 칠판에 적은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였지요.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시인이라기보다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모양입니다. 그 멋진 시구 앞에서 이런 생각한 것을 보면.

'그동안 우리는 푸른 종이 위에 한 꺼풀 내려앉은 먼지만 본 것은 아닌가. 푸른 종이가 먼저 보였다면 그 먼지를 닦아주고 싶었을 텐데….'

또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이를 먼지로 생각하는 교사가 행복할까? 푸른 종이로 바라보는 교사가 더 행복할까?'

아이를 먼지로 생각하는 교사는 먼지투성이인 교실에서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비록 먼지투성이지만 아이의 푸른빛을 발견한 교사는 푸른빛과 더불어 하루를 살게 될 것입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a 아이들 작품 누가 강의를 들으려 오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예쁘게 적어 코팅해서 내는 숙제를 성실하게 잘 한 아이들이라고 했다.

아이들 작품 누가 강의를 들으려 오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예쁘게 적어 코팅해서 내는 숙제를 성실하게 잘 한 아이들이라고 했다. ⓒ 안준철


흔히 '요즘 아이들'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뜻에서 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절대 금물입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입니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먼지투성이인 푸른 종이의 푸른색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푸른색을 가리고 있는 먼지를 닦아주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어떤 순서를 바꾸어주기만 하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3년 동안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아이의 입이 동시에 열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거요."
"공부 열심히 하는 거요."


두 아이는 그것이 정답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웃음 띤 얼굴로 두 아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저를 시인으로 초대했지요? 명색이 시인이라는 사람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는 그런 말을 하려고 여러분을 만나러 왔을까요?"

그러자 이번에도 두 아이의 입이 동시에 열렸습니다.

"꿈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요."


두 아이의 순발력이 대단했지만 그것도 제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드디어 제 입이 다시 열렸습니다.

"행복입니다."

아마도 제 입에서 발음된 '행복'이란 단어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배반한 듯싶었습니다. 제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 뒤에야 아이들의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 맞지요? 여러분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도 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아닌가요? 인간이 80평생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그 중 한 부분인 학창시절도 행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만, 여러분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보내는 학생이란 말이지요. 그러니 배움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지 못하면 행복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뭔가 답을 찾은 듯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습니다. 아이들은 혹시, 지금 나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고도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날 강의를 마치면서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도 하듯,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이 학생이라고 절대 행복을 포기하지 마세요. 한순간 한순간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어요. 한 권의 책을 보더라도 시시하게 대학입시만을 염두에 두지 마세요. 그러기에는 여러분의 삶이 너무 소중해요. 행복하게 책을 읽으세요. 공부를 즐기면서 학창시절을 행복하게 보내세요. 그 결과 여러분이 원하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보너스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어차피 주어지는 그 보너스만을 위해서 인생을 걸지는 마세요."
#중마고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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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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