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궁풍양궁이 있었던 남양주 진접면 내각리에는 주택가에 휩싸인 비각만이 이곳이 궁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정근
원경왕후의 국장을 마친 태종은 풍양궁에 칩거했다. 당당했던 태종이 생의 동반자를 잃고 날개가 꺾인 듯 의기소침했다. 옆구리가 시림을 느꼈다. 살아생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원경왕후가 떠나고 난 다음에 대비가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동지였다는 것이 새삼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아버지에 항거하여 혁명의 깃발을 들었을 때 병장기를 내주며 격려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처형할 때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부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뭔가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을 때 해원(解寃)의 살풀이를 하지 못한 것이 유감으로 남았다.
더욱이 대비가 운명하였을 때 장모인 삼한국대부인 송씨가 명빈전(明嬪殿)에 전(奠)을 올리며 오열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송씨는 대비의 모친이다. 그 모습이 사위 잘못 만나 아들 잃고 딸을 먼저 보내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태종은 환관을 불러 송씨에게 날마다 술 두 병씩 내려 주라고 명했다. 마음의 징표다.
풍양궁으로 유정현이 찾아왔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송씨가 제주에 있는 죄인 유해를 거두어오기를 청합니다.”
제주에서 처형되어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고 있던 민무질 민무구의 유해를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제주 안무사에 명하여 배와 양식을 대어주도록 하라.”
제주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민무질 민무구의 유해가 육지로 옮겨져 노모의 손에 의하여 안장되었다. 태종과 처가의 살풀이는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태종 사후, 세종이 삼한국대부인 송씨가 병이 났을 때 외가에 거둥하여 문병하는 것으로 부왕의 뜻을 대신했다.
운명은 재천이라지만 몸 둘 바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