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성의 정치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정치 대립의 격렬함이라는 주된 이유 이외에도 이런 구도 자체가 기존 주류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는 ‘최악회피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의제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정과 선택행위에 대한 다양한 프레임 실험 결과들은 의제 설정의 성격에 따라 인간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논리적으로 또는 수학적으로 같은 내용의 질문이라 할지라도 그 질문을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응답자는 전혀 다른 선호를 보인다.
다양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예상되는 결과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모험하지 않고 확실한 실리를 선택하지만(최선선호효과), 예상되는 결과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사람들은 확실한 손해를 선택하기보다는 모험적으로 위기를 받아들인다(최악회피효과).
즉, 의제가 대안적으로 형성되었을 때는 ‘더 좋은 대안’을 선택하려 하지만, 의제가 부정적으로 형성된다면 확실한 위험을 회피하기 해 모호한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정치 분석에 대입해 보면 적대성의 정치는 ‘최악회피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확실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모호한 차선책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대립적인 정치세력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대화함으로써 대항세력으로서의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감수하게 만든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가 탄생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은 다른 이에 대한 인상평가에 있어서 긍정적 단서보다는 부정적 단서를 더욱 중요시 여긴다. 또한, 사회적 위기요인과 관련된 사안일 경우에도 부정적으로 제시된 메시지가 긍정적 메시지보다 더 많은 사회적 주목을 유발하며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이 때문에 정치경쟁에 나선 이들은 끊임없이 네거티브 전략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2007년 대선을 지배하고 있는 ‘반노무현’ 프레임과 ‘반이명박’ 프레임 또한 상대를 ‘최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최악회피효과를 노린 프레임 전략이다.
이는 적대적인 두 세력을 중심으로 세력관계를 재편하는 양강구도를 고착시키며 적대와 증오의 감정을 끊임없이 강화한다. 물론 이번 대선은 전통적인 양강구도가 아니라 1강 2중 구도를 형성하고 있지만, 이는 총선과 연계되어 있는 정치일정의 영향이 크다. 만일 총선이 없었다면 선거가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후보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소수’세력이 기존 정치세력이 안정적인 대립구도를 이루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뭘까? 방법은 두 가지다. 부정적으로 프레임 된 대립구도 내에서 저항을 주도하던가, 대안을 중심으로 대립구도를 프레임 해 내는 것이다.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보수세력 간의 양강 구도로 재편되어 온 87년 체제 하의 한국 정치에서, 자유주의 개혁세력을 제외한 진보세력은 아직까지 소수다. 따라서 진보는 저항을 조직하더라도 이를 대안적 성격으로 전환해야만 정치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진보적 대안이 대중에게 ‘확실한 선호’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진보세력은 적대성이 지배하는 부정적 프레임 아래 주류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최악회피효과’에 스스로 매몰되고 있다. 이는 조직된 저항을 새로운 대안으로 전환시킬 의제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7대 총선까지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라는 매우 추상적인 대안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던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 성공 이후 대안적 대립구도를 창출시킬 만한 종합적 프레임(positive master frame)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성공적인 저항의 동원이라 평가할 수 있는 ‘한미FTA 반대투쟁(반신자유주의투쟁)’의 경우도 ‘좋은 대안’을 선택하는 긍정의 프레임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최악회피효과’를 창출시켰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로 대립전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현실은 반노무현 전선을 고착시키는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보수세력 간의 경쟁구도가 반신자유주의 대립구도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무현 정권이라는 실체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는 데 그쳐 버렸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대안체제에 대한 추상적 수준의 그림조차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새로운 대안체제를 위한 동력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 대안 없는 비판은 현상유지나 비판의 대상이 등장하기 이전으로의 회귀를 의미할 뿐이다.
오늘날 국민이 느끼고 있는 생활상 곤란함이나 불만은 현상유지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시대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심리가 강화됐고, 산업화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왔다. 무시할 수 없는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성과에도 산업화 세력을 상징하는 이명박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에 대한 실망이 새로운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현상은 현실의 고통에 대한 진보적 대안이 국민적 수준에서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국민에게 제시된 양자택일은 지난 5년의 허탈감을 다시 5년 간 연장할 것인지, 다른 세력으로 교체할지에 대한 선택지였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냉정한 현실에서 대선 이후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는 대선 결과가 보나마나 한 결과여서가 아니라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괴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령 자유주의 개혁세력이 다시 한 번 정권 연장에 성공한다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포괄적인 대안 연대로 공동의 대안을 형성해야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대안이 없었다는 주장 앞에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과연 대안이 없는가? 각종 사안에 대한 진보적 대안은 지금도 넘쳐난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안은 ‘각자’의 대안일 뿐, 공동의 대안은 아니다. 각각의 진보적 대안들이 어울려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기 어렵다. 합의가 창출되지 못한 개별적 대안을 중심으로 지배적인 대립구도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총체적인 국가체제에 대한 전망의 부재다. 진보세력이 집권을 한다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지 국민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전체적인 조망도가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조류의 진보적 대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해답은 ‘대안 종합’에 있다.
큰 방향의 합의 속에서 모자이크를 맞추듯 흩어져 있는 다양한 영역의 진보적 대안을 국가운영 프로그램이라는 틀 속에 끼워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이 대안을 실현할 주체도 특정 정치세력이나 조직이 아닌 각각의 영역에 이해관계를 갖는 모든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저항적 수준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안을 현실화할 동력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진보세력이 집권 후 프로그램을 미리 마련하지 못한다면 결코 집권을 꿈꿀 수 없다. ‘최악회피효과’를 대체할 ‘최선선호효과’를 창출하기 위해선 적대성의 정치를 국가체제에 대한 전망이 경쟁하는 대안 경쟁의 프레임으로 전환시켜야 가능하다.
이 과정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겐 이미 무수한 대안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것이 활발한 의사소통을 통해 종합되지 못했을 뿐이다. 다양한 개별적 대안 간 의사소통의 부재는 진보의 범주조차 제대로 그려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90년대 초반을 지나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진보세력은 서로 간의 관계가 단절된 채, ‘귀머거리와의 대화’만을 거듭해 왔다.
관계 형태의 대안적 재구성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세력과 개인들이 하나의 종합적 프레임(master frame) 내에서 각자의 활동을 활발히 펼쳐 나갈 수 있다면 다양성은 강점이 된다. 그러나 각론 수준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의 활동을 옭아매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나타난다면 자기 소멸이라는 결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현재 진보를 표방한 민주노동당 역시 ‘적대와 증오’의 감정으로 점철된 비판적·저항적 내부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관계가 아닌 편을 나누고 서로를 공격하면서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퇴행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왜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을 지지했던 국민들이 자신이 아니라 보수정당 후보에게로 지지를 전환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을 지지했던 국민이 더욱 진보적인 정당으로 지지대상을 전환하는 것은 단순히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을 공격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민이 개혁세력에게 기대했던 요구들을 대신 실현시켜 줄 수 있다는 확신만이 지지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다양한 입장과 대안은 큰 틀 내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다른 세력을 비판하며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장하는 대안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현실적 정당함을 인정받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관계형태의 대안적 재구성을 이뤄낼 수 없다면, 진보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으로,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대안적 연대 없이 대안적 민주주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1987년 13대 대선부터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둔 시점까지 대선과정을 간략하게 검토했다. 87년 체제로 상징되는 20년간의 기간은 다양한 사회적 대항과 저항이 분출한 역동적인 정치변동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체제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과거의 유산에 발목 잡혀 있다. 20년 동안 진보운동과 정치의 성과는 새로운 대안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를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다.
벌써부터 17대 대선 이후의 세상에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민주주의의 후퇴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대응방안을 구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예측가능 한 대선 이후 대립구도는 보수적 헤게모니가 확립된 가운데 이에 대한 비판적 성격의 저항운동이 강화되는 형태다.
‘저항의 동원’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은 허무한 대선판도에 대한 작은 위로다. 그러나 현실은 저항의 동원마저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대선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칠 수밖에 없는 18대 총선은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와 통합민주신당과 이회창의 신당이 2중을 이루는, 2007년 대선의 재판일 가능성이 높다.
BBK 사건 등으로 형성된 ‘반이명박’ 구도가 총선까지 유지된다 하더라도 진보적 헤게모니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사회 각 영역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저항의 성과도 결국 권력투쟁을 중심에 둔 신자유주의 세력들이 나눠 가지게 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설령 진보·개혁 세력이 저항을 주도하더라도, 이것이 새로운 대안체제를 열어내는 동력이 될 것이냐, 아니면 87년 체제의 재판이 될 것이냐는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실한 희망을 걸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은 기존 정치구도와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적 힘을 형성시켜는 것이다. 바로 ‘당사자’ 운동이다. 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이 자신들을 대변하겠다고 약속하는 정치세력에게 기대를 거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정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운동이 필요하다.
이 운동은 저항을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안을 동원하는 포괄적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각 영역에서 당사자들이 벌이는 다양한 활동과 투쟁이,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자연스레 결집되어 나타나는 새로운 체제 전환 운동으로 상승되어야 한다. 곧, 동력이 형성되면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 자체가 동력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보수세력은 10년 동안의 정치적 위기를 겪으며 치밀한 준비 끝에 진보·개혁 세력과의 헤게모니 경쟁에서 승리했다. 오늘날 위기를 겪고 있는 진보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의 위기가 보다 근본적인 진보적 전환을 위한 기회가 될지, 까마득한 ‘어둠의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이스트플랫폼(www.eplatform.or.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2.14 11:14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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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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