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병이 없는 대장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12] 보성 - 머슴 출신 안규홍 의병장 (1)

등록 2007.12.15 18:17수정 2007.12.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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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살이' 의병장 후손을 찾아가다

전남 고흥을 출발하여 도로표지판과 드문드문 지나는 행인에게 물어가면서 조성면을 찾아갔다. 고흥에서 보성군 조성면으로 가는 지름길은 폭이 좁은 지방도로로 군데군데 한창 도로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아직도 개발의 손길이 별로 미치지 않은 듯, 1970~80년대의 모습으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담살이’란 전남지방 방언으로 ‘머슴살이’를 말한 바, ‘안담살이’란 별칭의 안규홍이 담살이 출신으로 100년 전, 그 무렵 숱한 유생을 젖히고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고영준 선생은 분명히 남다른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규홍 의병장(뒷줄 왼쪽부터 여섯 번째) 구한말 의병장들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된 호남의 의병장들로 대구감옥에 갇혀 있던 당시의 모습이다(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우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의병장).
안규홍 의병장(뒷줄 왼쪽부터 여섯 번째)구한말 의병장들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된 호남의 의병장들로 대구감옥에 갇혀 있던 당시의 모습이다(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우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의병장). 눈빛출판사

중국대륙에서도 그랬지만 답사여행 중, 유적지나 길을 잘 모를 때는 그 지방 관공서를 찾으면 가장 잘 가르쳐 준다. 중국에서는 주로 그 지방 인민정부를 찾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군청이나 면사무소를 찾으면 된다. 중간에 몇 차례 후손 집으로 전화를 하였으나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조금은 불안하였으나 곧 밖에서 돌아올 거라는 기대로 찾아갔다. 부지런히 달려갔으나 그새 오후 4시가 넘었다. 해가 짧은 초겨울로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집 앞까지 안내해 준 조성면민회 정윤래 회장
집 앞까지 안내해 준 조성면민회 정윤래 회장 박도
조성면사무소에서 안규홍 의병장 후손 안병진씨 집을 찾자 직원이 손전화와 집 위치를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자신을 조성면민회 정윤래씨라고 소개한 이가 아무래도 못 미더웠든지 자기 차를 따르라고 하면서 2킬로미터 남짓한 덕산리의 안규홍씨 대문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하지만 집은 비었고, 손전화는 엉뚱한 곳만 연결되었다.

우리 일행 세 사람은 동네 어귀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웬 영문이냐고 묻기에 사정을 말하자, 아마도 안병진씨는 오늘 밭에 보리씨 뿌리러 갔을 거고, 부인은 보성의 어느 식당에 일하러 갔을 거라고, 조금 기다리면 안병진씨가 먼저 돌아올 거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이 동네 어귀를 서성거리는 게 마치 지난날 헌병 보조원이나 밀정이 의병이나 독립투사를 붙잡고자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무작정 기다리기를 한 시간여 땅거미가 완전히 졌다.


 안 의병장이 활약했던 득량만 들판
안 의병장이 활약했던 득량만 들판박도

꿈 같고 신화 같은 이야기지요

그제야 안병진씨 집으로 트럭이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가자 반갑게 맞았다. 손전화는 오래 전부터 바뀌었는데 면사무소에서 지난 번호를 가르쳐준 탓이라고 하면서 마침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고 하면서 전기장판을 꺼내 거실에 깔았다.


- 언제 이 마을로 오셨습니까?
“할아버지(안 의병장)는 후손이 없었어요. 우리 할아버지(이복형) 규태의 둘째 아들이 대를 이었지요. 왜놈들 피해 요리로 왔다고 그러더구먼요.”
    

 안규홍 의병장 후손 안병진씨
안규홍 의병장 후손 안병진씨박도
- 의병장 후손으로 살아온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가방 끈이 짧아요. 중핵교밖에 못 나왔시오. 그래서 이발소에서 일도 하고…… 지금은 농사짓고 있어요.”

- 얼마나 지으십니까?
“한 이십 마지기 짓고 있어요.”

- 담살이로 의병장이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저희 증조할아버지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하셨다는데 참 자랑스럽지요. 문덕면 산골짜기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고 실천하셨는지 꿈 같은 얘기고 신화 같은 이야기지요. 그만큼 할아버지는 마음이 담대하고 (도량이) 크신 분이었나 봅니다. (머슴도) 다 같은 백성인데 ‘이름이라도 냄기고 죽자’라는 그런 큰 뜻이 있었다고 봐요.”

- 의병장 후손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희 집안에서 오래 전(1978년)부터 사당이랄까 기념관 건립을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졸병이 없는 대장이 어디 있습니까? 호남 어디 한 군데에다가 전 의병의 넋을 기리는 큰 사당이랄까 탑을 세웠으면 좋겠구먼요.”

곁에서 줄곧 잠자코 듣고만 있던 고영준 선생이 물었다.

“3.1절이나 8.15 광복절 날 군에서 인사나 있습니까?”
“없어요. 그 전(임명 때)에는 군수가 해마다 한 차례 찾아와서 제수에 쓰라고 봉투 하나 놓고 갔는데 민선 이후에는 꼴도 못 봤소.”
“그래요? 내가 사는 곳(담양)이나 이웃 장성은 일 년에 두 차례씩 꼭 찾아오는데…….”
“…….”

느닷없이 찾아간 불청객이 더 이상 머물기가 미안했다. 취재에 뭔가 미진했지만 날도 저물고 시장도 하여 작별 인사를 드리고 귀로에 올랐다. 그새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조선왕조는 왜 망했을까

창평으로 돌아오면서 조선왕조가 왜 망했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500년의 왕조가 망하는 데는 그 까닭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게다. 한 역사학자는 정치적으로는 국민주권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전제군주제 때문이요, 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의 발전을 극히 제한하는 지주 소작 중심체제 때문이요, 사회적으로는 양반 상놈의 신분제 때문이요, 사상적으로는 성리학 유일체제가 너무 오래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파청 비들고개에 세워진 파청승첩비. 이곳은 안규홍 부대가 1908년 2월 적장 나가또와 하라이 및 그 부대를 섬멸한 곳이다.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파청 비들고개에 세워진 파청승첩비. 이곳은 안규홍 부대가 1908년 2월 적장 나가또와 하라이 및 그 부대를 섬멸한 곳이다.박도
일찍이 시민혁명으로 민주사회를 이룬 서구 열강들은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의 국가를 이뤘다. 그런 문물을 재빨리 도입한 일제도 부국강병을 이뤄 서구 열강과 더불어 식민지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고 있는데, 그때까지도 양반 상놈의 고루한 사회제도에 묶여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조선왕조는 그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더욱이 조정에는 매국노가 득실거리고 탐관오리들이 백성들 수탈에 여념이 없는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쏜가.

나는 미천한 머슴의 신분으로 의병장이 되어 장렬히 순국한 안규홍 의병장이 더욱 우러러 보였다. 강원도 내 글방으로 돌아온 뒤 의병장의 유적지를 집필하면서 부족한 취재로 글을 쓰는 게 안 의병장의 행장을 모독하는 것 같고, 그분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에 취해 보성 안병진 후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까이에 있는 산소에 들러 절도 올리지도 못하고 …… 아무래도 한 번 더 다녀와야겠습니다.”
“저도 그날 경황이 없어 물도 한 잔 대접치 못해 짠했소. ‘담산실기’란 책도 드리지 못했구먼요. 얼른 오시오.”

나는 지난 12월 8일 다시 안규홍 후손 안병진씨를 찾아갔다.
#의병 #의병장 #안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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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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