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미 국무부 문서의 요약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은 1980년대 이후에 생긴 비교적 최근의 현상일까? 반미감정은 과연 철없는 386세대의 전유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이미 대한민국 건국 당시부터 존재한 ‘국민적 정서’였다.
그 점에 대한 한 가지 증거를 <미 국무부 한국 국내상황 관련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료 대한민국사> 제20권에 실린 이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www.history.go.kr)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이 국무부 문서는, 전미(全美) 해군 요리사 및 사환연맹(MC&S)의 기관지인 <보이스> 1951년 2월 23일호에 소개된 주한 미국해군 잠수함 라이더 빅토리호 및 레인 빅토리호 승무원들의 여론을 요약하여 보고하는 글이다.
이 문서의 작성자인 국무부 니콜슨은 <보이스> 기사에 실린 주한미군의 분위기를 국무부에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니콜슨이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에 대한 미군 병사들의 인식이다. 한국인들의 반미감정과 관련하여 니콜슨이 요약·보고한 <보이스>의 기사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은 두 군데 정도다.
첫째, “한국인들은 미군을 싫어한다”는 표현이다.
둘째, “나는 이곳이 나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어느 병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주로 바다에서 활동하는 잠수함 승무원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미군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상도 아닌 해상에서 활동하는 잠수함 승무원들마저도 자신들이 한국인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면, 이는 주한미군 병사들이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반미 감정이 한국 내에 광범위하게 조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보이스> 기사나 니콜슨의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낯선 것’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별다른 설명 없이 “한국인들은 미군을 싫어한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에 관해 따로 부연설명을 할 필요도 없을 만큼 미국인들이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군용 트럭에 탄 미군들이 초콜릿을 던지고 그것을 주우려고 몰려드는 1950년대의 한국인 꼬마들. 이런 이미지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1950년대의 한국인들을 친미주의자 아니 숭미주의자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태연스럽게 보고하고 있는 위 문서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이스>나 국무부 문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분명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당시의 한국인들이 미국을 은인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위와 같은 보고서가 국무부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럼, 당시의 한국인들은 어떤 이유에서 반미감정을 품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제가 패망한 뒤에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점이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행세했다는 점은 자세히 부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본군이 패망했다고 만세를 외친 한국인들의 눈에, 일본군 대신 들어온 미군의 존재가 어떻게 비쳐졌을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해방 이후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정치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그 계승세력이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진압되었다는 점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상세히 밝힌 바와 같이, 1945년 8월 17일에 발족한 건준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말까지 한반도 전역에 145개의 지부를 두었음은 물론 전국의 치안까지도 효과적으로 장악했다.
브루스 커밍스도 인정한 바와 같이, 건준과 그 계승세력은 8·15 직후의 한국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국민적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대대적인 진압에 의해 참혹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건준에 대한 탄압은 한국인들의 자주성에 대한 탄압이었다.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이 참여한 건준세력이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본 한국인들에게 미군이란 존재가 어떻게 각인되었을 것인가는 쉽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에 주된 책임을 진 쪽은 북한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당시 10대 중반 이상이었던 1935년 이전 출생자들의 전쟁 경험담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표현은 “인민군이 아닌 미군이 양민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면, 위의 미 해군 잠수함 승무원들이 자신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필요가 있었을까?
대체로 위와 같은 세 가지 요인들이 <보이스>나 국무부 문서에 보고된 반미감정의 배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매우 당연하게 기술되고 있는 위의 문서를 볼 때에, 우리는 1935년 이전 출생자들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반미감정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주도의 반공독재 분위기 속에서 “반공정권과 미국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의식의 포로가 되긴 했지만, 그들의 의식 저변부에는 미국에 대한 원초적 저항감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이스>나 국무부 문서에서 우리는 1935년 이전 출생 세대가 품고 있던 그러한 정서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은 1980년대 이후에 생긴 게 아닌, 이미 대한민국 건국 시기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35년 이전 출생자들은 ‘안정적’인 개발독재 세대가 아니라, 사실은 반미감정을 의식 저변부에 깔고 산 ‘위험한’ 세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미감정을 ‘위험한’ 감정으로 보면 말이다.
반미감정을 철없는 386세대의 전유물로 보거나 혹은 이러한 감정을 위험시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초석을 세운 1935년 이전 출생 세대의 삶과 고난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가슴에 품었던, 하지만 끝내 드러내지 못한 그 반미감정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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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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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미국 문서 "한국인들은 미군을 싫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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