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심은 잣나무. 이제 잣나무를 타고 오를 악동이나 창문을 열고 소리칠 선생님. 누구 하나 없다.
안호덕
예전 나무 바닥이 있던 건물은 헐려진 지 오래다. 빈 공터. 30년이 지난 추억을 찾기는 애초 나의 욕심인지 모른다.
경계선을 칼로 파낸 두 사람이 같이 앉던 책상. 한겨울 고구마·감자를 굽고 도시락을 덥혔던 갈탄난로. 검정 고무신이 조르르 놓인 신발장. 침묻혀 꼭꼭 눌러쓰던 누런 공책. 이런 것들은 이제 인사동 골목에 '학교종이 땡땡땡'이라는 찻집에서 찾는 게 빠를 것 같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학교 돌담. 교문보다 더 뻔질나게 타 넘어 다니던 돌담은 그대로다. 그 위에 주르르 심긴 잣나무들.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 심은 것 같은데. 쉬는 시간마다 주전자에 물 떠나르고…. 그게 30년이 더 되었다. 이제는 꼭대기에 탐스런 잣송이가 열었는데.
허나 뭣 하랴. 잣송이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나무를 타고 오를 악동들은 남아있지 않다. 창문을 열고 소리칠 선생님도 떠난 지 오래인 학교.
강화도 폐사지에 갔을 때, 나는 돌 틈에서 발견한 깨어진 그릇 조각 하나를 보면서 박물관에 진열된 온전한 도자기를 볼 때보다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옛 갈탄 창고는 없어졌지만 바닥에 아직도 박혀있는 갈탄 찌꺼기. 그 정도면 얼굴이 시커멓게 되도록 교실로 갈탄을 퍼 나르던 기억, 밑불을 만들려고 늦가을 전교생이 산에 솔방울을 따러 가던 기억들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온실이 되어버린 학교 운동장. 비 한번 오면 툭툭 불거져 나온 돌. 보드라운 마사토 한 차 사넣을 여유도 없는 학교에서는 연래 행사처럼 전교생이 냇가에 가서 흙을 떠 오는 날이 있었다. 남학생은 비료 포대에, 여학생들은 대야에 이고 지고 선생님에게 팔뚝에 도장을 몇 개씩 받고서야 일은 끝이 났다.
저 운동장 한 쪽에는 살구나무 몇 그루 심겨 있었다. 봄이면 살구꽃 피고 박새가 집을 짓고 초여름에는 살구를 따서 전교생에게 몇 개씩 나눠 주었다. 교실 앞 몇 아름된 버드나무, 후문 쪽 그보다 그 더 큰 버드나무는 놀이터이자 동네 어른들의 쉼터였다. 이제는 살구나무도 버드나무도 다 베어져 없다.
2982명을 배출했던 이 학교의 교가는 잊혀진 노래교무실 앞에는 펌프가 있었다. 언제 전기모터 수도가 들어온 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수도가 들어오고도 몇 년은 펌프질하는 펌프가 그 자리에 있었다. 축구를 하거나 운동장에서 흙장난을 하고나면 몰려가 웃통을 내놓고 머리를 감았다. 그 자리에 교적비가 서있다.
교적비. 학교에 흔적을 적어 놓은 비. '교적비. 창락초등학교 1937년 6월 22일에 개교하여 졸업생 2982명을 배출하고 1999년 9월 1일 폐교되었음. 1999년 9월 1일 경상북도교육감'
60여년 세월동안 3000명도 안 되는 학생을 배출하고 학교가 문을 닫은 것이다. 그 3000명이 안되는 졸업생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도 있고 삼촌들도 있고 형도 있고 동생도 있다.
경상북도 가장 북단의 초등학교. '소백산과 도솔봉에 정기를 받고~'로시작되는 교가는 영영 잊혀진 노래가 되었다. 빈 학교,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자리에는 무덤 비석 같은 교적비만 덩그렇게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