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수수 잘 먹을게요. 너무 고마워요!"

이웃의 정으로 수수를 넣은 화려한 잡곡밥을 짓다

등록 2008.01.05 11:39수정 2008.01.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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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보내 준 수수이다. 아내는 대바구니에 넣고 귀하게 먹는다. ⓒ 전갑남


집에 돌아오니 현관문 앞에 뭐가 놓여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못 보던 것이다.


'이게 뭐지?'

집 안엔 인기척이 없다. 아내는 아직 퇴근 전인 모양이다. 집에 사람이 없으니 누가 물건을 놓고 간 게 분명하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택배로 물건을 부쳐 올 때나 우편물이 있을 때 현관문 앞에 놓고 간다.

마루 끝에 있는 바구니로 덮어있다. 덮개를 열어보았다. 수수가 담겨있는 봉지이다. 대파가 담긴 봉지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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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비닐봉지 속에 대파가 들어있었다. 할머니 마음이 느껴진다. ⓒ 전갑남


누가 수수와 대파를 갖다놓았을까? 쪽지를 남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쉽게 짐작이 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이웃 밭을 가꾸는 장터 할머니가 가을걷이 끝낸 후, 대파를 뽑으러 왔다가 수수와 파를 놓고 가신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작은 것에 감동한다는 말이 맞다. 아마 거기에는 정성이 담긴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할머니의 소박한 마음과 정성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고마우신 장터 할머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 서산에 걸린 해가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만큼이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아내가 때맞춰 차를 몰고 들어왔다.

"여보, 장터 할머니가 수수를 갖다놓으셨나 봐!"
"수수를 요? 올해도 또 보내셨네."

수수가 든 봉지를 보고 아내도 감동 먹은 표정이다. 각별히 우리를 챙겨주시는 장터 할머니, 그 마음을 읽고도 남음이 있어서 일게다.

할머니는 우리 대문 바로 앞에 있는 밭을 가꾸신다. 조그만 밭떼기에 만물상을 차리듯 이것저것 많이 심는다. 각종 푸성귀며 고추, 고구마, 파, 콩 등을 심는다. 가용으로 주로 쓰고, 남는 것은 내다 팔기도 한다. 

할머니는 팔순을 넘긴 연세이다. 무릎관절이 편치 않아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 한 발짝 한 발짝 옮길 때마다 힘이 들어 보인다. 그래도 밭일할 때는 어디서 힘이 나오는 걸까? 얼굴을 마주대하면 늘 웃음을 잃지 않으시며 말씀이 푸짐하시다.

"이놈의 밭일, 힘이 들어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안하면 편할 것 같은데, 손을 놀리면 좀이 쑤시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몰라. 돈도 안 되는 일한다고 아들 녀석은 한사코 말리는데!"

할머니한테는 어찌 보면 밭이 안방이나 마찬가지다. 호미가 닳도록 틈이 나면 밭에서 사신다.

지난 여름, 장맛비가 그치자 할머니는 수수 모종을 한 움큼 들고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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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가꾸셨던 수수밭이다. ⓒ 전갑남


"밭 가장자리에 수수를 심어 봐! 대여섯 포기씩 꽂아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키가 크지! 수수밥 좋아하지 않어? 방아 찧을 때 우리 것에 보태 찧으면 되니까 그것은 걱정 말고."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우리도 수수를 조금 심었다. 그런데 수수 자라는 게 시원찮았다. 거름기가 없는데다 비바람에 쓰러지고, 거기다 수확 무렵에는 비둘기 떼가 죄다 쪼아내어 심으나마나였다.

할머니는 우리 사정을 알고 방아 찧어 수수를 갖다놓은 게 아닌가?

"맛나게 먹으면 내가 고맙지!"

나는 장터 할머니댁에 갔다.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할 성싶다. 할머니가 저만치서 나를 보자 반갑게 맞이한다.

"아니, 선생님이 웬일이셔? 요즘 통 얼굴 보기가 힘들어!"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수수 갖다놓으셨나 봐요?"
"어떻게 알았지?"
"할머니 아니면 누구겠어요? 다 알죠."

더 많이 주고 싶은데 수수를 털어놓고 보니 할머니네도 수확이 별로였다고 한다. 얼마 안 되지만 맛있게 먹으란다.

"우리 집사람이 아주 귀하게 먹겠대요. 너무 고마워요."
"맛나게 먹으면 내가 고맙지!"

고맙다는 인사에 할머니는 되레 손사래를 치신다. 밭일 할 때 말동무해주고, 가끔 나눠먹는 음료수 한 잔이 늘 마음에 남아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무시로 우리 집을 드나드신다. 밭에서 일볼 때 우리 집 연장을 빌려 일을 하기도 하고, 농약 칠 때나 가물어 작물에 목을 축일 때 우리 집 물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집 평상은 할머니 쉼터이다.

이웃간의 두터운 정이 이런 게 아닐까?

밥에 수수가 들어가니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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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컵에 수수를 불려 밥 지을 때 넣는다. ⓒ 전갑남

아내는 잡곡을 넣어 저녁을 지을 모양이다. 아내와 나는 잡곡을 참 좋아한다. 흰쌀로 밥 지을 때가 거의 없다. 온갖 잡곡을 넣어 밥을 짓는다. 집에서 수확한 콩을 넣어 지으면 그 맛이 더 좋다. 콩도 완두콩, 강낭콩, 서리태 등 여러 가지를 조금씩 넣는다. 보리쌀도 빠지지 않는다.

"여보, 오늘은 수수도 넣어야겠네!"
"그럼요. 수수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요."

수수는 맛이 좋고, 성질이 따뜻하여 장 기능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졌다. 특히, 설사를 멈추게 하는데 효능이 있다. 예전 어린아이의 생일이나 돌에는 수수경단을 만들어 먹었다.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므로 이의 접근을 막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내가 할머니가 보낸 수수를 한줌 꺼낸다. 저녁으로 안친 잡곡이 여러 가지이다. 흰쌀에 흑미, 강낭콩, 서리태, 녹두를 약간 넣는다. 거기다 빨간 수수가 들어가니 오곡밥인가?

압력밥솥에서 "칙칙" 소리가 난다.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오른 밥을 푼다. 공기 그릇 가득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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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각종 잡곡을 넣어 밥을 짓는다. 우리 집 영양밥이다. ⓒ 전갑남


밥이 보약이라고 한다. 사람은 밥 힘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맛있는 반찬이 있어도 밥맛이 좋아야 진수성찬도 빛이 난다.

잡곡이 들어간 밥이 화려하다. 영양이 듬뿍 들어간 밥이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었다. 포만감을 느끼며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수수가 들어가 더 찰지고 맛있네. 할머니 마음까지 담아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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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가 들어간 맛과 영양 만점의 잡곡밥 ⓒ 전갑남

#수수 #수수밥 #잡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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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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