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d in hand두 달이 되어가는 즈음의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다.
임준연
이 곳은 산 중이라 가까운 도시래야 전주와 대전인데,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거리상으로는 전주가 가깝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전주 산부인과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우린 전주의 좋은 산부인과를 찾아 사전답사를 했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정이었는데, 아내는 웹사이트를 통한 정보로 무려 스무가지에 달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서는 들고 다니면서 꼼꼼히 체크했다.
산후조리원을 겸한 산부인과를 다녀보았는데, 조리원 시설이며 가격·서비스·의료진 평가도 따져보고 진안까지의 거리도 확인한 끝에 B산부인과로 정했다.
깜짝 놀란 것은 서울에서보다 시설이나 서비스는 훨씬 좋은데도 기간당(보통 2주) 가격이 서울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뻤다. 백만원이 내 손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리원엔 두 가지 등급이 있었다.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는 특실, 산모들만 숙박하는 일반실. 내가 진안에서 출퇴근해야 하는 터라, 산모들이 서로 육아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함께 생활하는 일반실이 덜 부담스러웠다.
양수 터진 산모 데리고 서울에서 전주까지 양수가 터졌다. 그것도 예정일에 삼주나 앞서서. 생각도 않고 가까운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서울 부모님 집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아래에서 물이 나온다"고 했다. 양이 많은 것을 확인하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이리저리 전화해보더니 일요일이라 근처 산부인과는 아기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양수 터져도 아기가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안심시키는 어머님 말이 야속하게 들렸는지, 아내는 계속 울면서 집을 나왔다.
나는 갈등했다. 진찰을 받았던 전주를 갈 것인가. 아니면 응급실을 가야 하나. 터미널 앞에서 표를 사려다가 불안한 나머지 근처에 성모병원으로 갔다. 응급실 갔다가 산부인과로 안내를 받아서 몇 가지 검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산부인과에는 당직 인턴들만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를 하고 난리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전주 한 번 다녀오자"고 이야기 했다. 상황을 듣고는 친구가 놀라서 허겁지겁 차를 끌고 병원으로 왔다. 병원 측에선 "병동에서 대기하다가 아기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를 데리고 친구차에 올랐다.
전주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병원이 보이자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양수는 조금씩 새는 모양이었지만 무사히 입원할 수 있었다. 당직 의사가 아내를 검사하고 나서 안정을 취한 상태에서 담당의사가 와서 촉진제를 주었다. 의사는 양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태라 잘못하면 위험하다고 했다. 꼬박 하루를 더 기다렸다. 그러나 진통도 안 오고 양수는 줄고.
결국 최후의 선택은 제왕절개 수술이었다. 하도 오래 기다려서 집에 가서 준비물을 챙기러 갔는데, 그 사이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어머님이 내려와서 아내 옆에 계셨지만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내가 없던 것이 아내에게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허겁지겁 들어와서 겨우 막 나와 씻겨진 아기를 안아보는데 무언지 모를 감정이 가슴을 때렸다.
분유 주지 마세요, 빛·난방 줄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