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의 설장구 공연김태성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분노와 고통으로 보냈던 젊은 날의 이별이 이제 축제의 장으로 승화되어 또 한 세월의 한 마디를 다듬고 있었다. 100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던 집행부가 부랴부랴 자장면 30개를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감동하고 있었다.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진도 홍주 판매행사에 선뜻 지갑을 꺼내는 모습이나, 즉석에서 홍주 병을 터서 어른들과 선배를 찾아다니는 후배들의 모습도 아름답기만 했다.
나는 1991년 봄, 전대 병원 위세척실을 잊지 못한다. 광주 전남에서 분신했던 박승희, 윤용하, 김철수, 정상순의 모습을 그곳에서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 이후 네 명의 청년 학생들이 영안실로 갈 때 울면서 동행했던 기억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 것인가. 통곡하며 보낸 장례식을 또 어떻게 잊을 것인가. 내가 겪었던 5월은 그대로 91년 광주 5월의 역사였다.
어렵게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를 만들고 꾸려왔던 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1월1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담양댐 주변의 식당에서 빙어를 먹었던 일, 회원체육대회, 동학 혁명전적지답사 등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이제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는 자리가 잡혔다고 본다. 박승희 학생의 외쳤던 단결과 반미구호가 잊히지 않고 있음은 진실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여 제 몸을 태운 많은 젊은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변변한 추모 모임조차 꾸리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이 나라의 민주화가 앞당겨졌음에도 그들의 죽음은 당시의 청년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