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 중인 조준웅 특검팀이 1주일째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 삼성본관 전략기획실, 이학수 부회장의 '안가'로 알려진 오피스텔 등 삼성 비자금 모집과 관리, 경영권 불법승계, 불법로비 등 삼성의 불법행위 단서가 포착될 만한 핵심장소는 빠짐없이 칼을 들이대고 있는 걸로 보인다.
특검팀은 14일과 15일 양일간 모두 13곳에 대해 동시다발 압수수색을 벌였다. 비자금 모집과 관리의 핵심라인으로 지목된 인물과 장소였다. 따라서 일반 기업수사에서 검찰이 보여줬던 대로 '박스때기'로 압수품을 수거해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영장을 집행하러 나간 검사와 수사관들은 건물을 나설 때 '빈손'이었다. 불법행위와 관계된 모든 자료가 파기됐을 거라는 추측이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입을 통해 확인됐다. 김용철 변호사가 지목한 본관 27층 비밀금고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특검팀이 전개한 첫 번째 압수수색은 별 성과 없이 끝난 게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특검의 압수수색은 성과가 없었다?
밀행성과 신속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압수수색에서 특검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여러 이유가 있다. 지난해 10월 김용철 변호사가 처음 문제제기를 했을 때 검찰이 미리 수사에 대비해 압수수색을 했더라면 실체적 진실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른 이유는 '관리의 삼성'인 삼성그룹이 이미 상당한 정도의 자료를 모두 폐기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러 언론을 통해 확인된 것처럼 삼성그룹은 다양한 형태의 자료 폐기를 지시했다. 삼성그룹의 한 직원은 "이미 1개월 전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며 "전략기획실 직원 10명이 1팀으로 계열사마다 다니면서 확인 작업까지 마쳤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정보유출'이다. 일각에서는 특검이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고급정보들이 알려질 대로 알려져 사실상 '공개수사'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언론들이 과도하게 삼성에 약이 되는 '정보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매일경제><중앙일보><문화일보> 등 일부 언론은 특검이 압수수색에 본격 착수하기도 전에 삼성그룹 본사와 계열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고기사를 내보내 사실상 특검의 수사를 방해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받는다.
<매일경제>는 13일 오후 5시 35분에 출고한 기사('삼성특검팀, 삼성물산 곧 압수수색')를 통해 조준웅 특검팀이 14일 오전 중으로 삼성물산 등 계열사에 대한 전면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신문은 "삼성 측 담당자들이 주말에도 출근해 압수수색에 대비했다"며 "삼성 특검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수사진행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이해해달라고 말해 압수수색 가능성이 임박했다"고 우회적으로 알려줬다.
또한, <문화일보>도 14일자 '이건희 회장 집무실 전격 압수수색' 기사를 통해 "특검팀은 이날(14일) 오후 승지원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끝나는 대로 수사관들을 투입해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의 전략기획실에 대해서도 추가 압수수색에 들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의 예상과 달리 삼성본관에 대한 압수수색은 15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됐지만 사실상 하루 전날 삼성그룹 측에 압수수색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가르쳐준 셈이 된다.
김용철 변호사가 위장계열분리를 주장하며 사실상 삼성그룹의 계열사라고 비판한 <중앙일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앙일보>는 15일자 1면에 '특검 승지원 압수수색' 기사를 내보냈다. 특검의 압수수색 첫날 활동을 전달하는 이 기사에서 <중앙일보>는 "특검은 조만간 삼성그룹 전체 운영을 관장하는 전략기획실 사무실 등에 대해서도 압수수색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14일 밤이나 15일 새벽에 작성된 걸로 보이는 이 기사는 각종 포털에도 15일 새벽 4시 23분에 전송돼 삼성 관계자라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특검의 압수수색 정보가 새나간다면 누구 짓?
이 같은 보도가 잇따라 계속되자 <한겨레>는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 압수수색 정보가 미리 새나간 게 아니냐"며 "수색 당일 삼성 직원들이 수사팀을 안내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16일자 신문을 통해 "14일 승지원 등에 대한 압수수색 뒤, 삼성그룹 주변에서는 본관 압수수색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15일 오전 9시께 특검팀 수사관 30여명이 삼성그룹에 도착하자 삼성 직원들은 일사분란 하게 수사팀을 '안내'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또 "한 경제지가 14일치 신문에 '이날 삼성물산에 대한 압수수색이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며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나간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삼성 특검을 취재하고 있는 한 기자는 "압수수색은 알아도 쓰지 않고 엠바고(보도시점유예)를 지키는 것이 법조기자들의 오랜 전통"이라며 "몇몇 언론들이 앞서나가 수사방해에 해당되는 보도를 했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압수수색은 밀행성과 신속성이 생명이다. 서울중앙지법 영장계는 "알아도 알려줄 수 없는 게 압수수색영장과 체포영장"이라고 못 박았다. 사실상 수사보안에 해당되는 정보를 쉽게 알려줄 수 없다는 얘기다.
"무리한 특종의식으로 공무집행 방해할 필요 없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압수수색이 사전고지 되면 사실상 의미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미리 보도함으로써 삼성에 대한 압수수색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에서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삼성과 그 계열사에 대한 압수수색 자체가 아니"라며 "특검의 압수수색 결과로 어떤 진실이 밝혀졌는지 하는 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이 삼성에 유리한 정보를 주려면 그냥 알려줄 수도 있는데 굳이 기사를 통해 밝힌 것은 아마도 무리한 특종의식 탓인 것 같다"며 "기자들이 당장 꼭 쓰지 않아도 되는 기사를 미리 내보내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17일 오전 서울 한남동 특검 기자실에서는 <머니투데이>가 "삼성중공업 압수수색" 1보 기사를 내보내 긴장감이 돌았다. 각사 기자들은 해당 회사 등 여러 취재라인을 동원해 확인하기 바빴다. 그러나 윤정석 특검보는 이날 오후 브리핑을 통해 "오늘 압수수색이 진행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며 사실상 이 신문의 보도가 오보임을 확인했다.
2008.01.17 18:14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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