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역사팩션] 제국과 인간 5회

청년 안중근과 소년 민필호

등록 2008.01.23 09:10수정 2008.01.3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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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제국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했다. 영국은 티베트를 또 침략했다. 이에 비한다면 일본 제국만 다소 지지부진하고 있는 편이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이완용 내각을 만들어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을 강행한 이래, 의외로 거센 조선인들의 의병 투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의병이 불길같이 일어나고 있는 남한 지역 대토벌 작전을 전개해 10만에 가까운 조선 인민을 학살해 가고 있었다.


빈농의 아들로 출생하여 하급 무사의 양자로 성장한 이토 히로부미의 출세욕과 업적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한성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한국 병탄 작업은 완료되었다고 여겼는지, 한국의 사법권을 빼앗는 각서 체결은 후임 통감 소네 아레스케에게 맡기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는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전용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본국의 유력한 차기 총리대신이었다. 운요호 사건을 유발하여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닫혀 있었던 조선의 문호를 연 것도 그였다. 그러고 보니 조선 병탄은 자초지종 그의 업적이었다.

이토는 좋게 말해 학구파였다. 그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병합하기 위해 치밀한 연구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 학자들을 불러 조선의 규장각 서고를 조사시켰다. 그러고는 고대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한일 관계를 기록한 책들을 추려냈다. 그는 규장각폭서목록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많은 귀중본들을 동경제대로 옮겨 연구하도록 했다. 그는 한일 병합의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제 그가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대견했다. 어린 시절 촌숙에서 어렵게 공부하던 일, 젊었을 때 남보다 앞서 미국에 가서 연수 받던 일 등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선명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은 가상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대일본제국 조선 통감의 전용 열차가 기적을 올리며 하얼빈 역내로 들어섰다. 일장기와 러시아 국기가 바람 타는 꽃밭처럼 요동쳤고 군악대의 밴드 소리가 무지개처럼 퍼져 올랐다. 초겨울 일본군대 원수의 제복에는 유달리 금장 단추가 많은 듯했다. 그는 빨간 머플러에 감색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숙한 자세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의 옆으로는 러시아 재무상이 있었고. 그의 뒤로는 하얼빈 총영사와 궁내대신 비서관, 그리고 유력 기업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사열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웬 일본인인 듯한 사람 하나가 환영 군중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너무도 태평하고 느렸기에, 누가 보아도 그것은 그저 조금 앞으로 나와 통감 각하의 얼굴을 좀 잘 보려고 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이토가 사열의 마지막 병사에게 먼발치서 눈길을 주고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아까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청년이 권총을 뽑아든 모습을 경호 군인이 얼핏 보았는가 싶었는데, 이내 통감이 쓰러지는 동시에 총성이 사람들의 고막을 때렸다.

안중근은 사수 중의 명사수였다. 그의 총알은 통감의 급소에 명중했다. 또한 안중근의 침착성과 기민성은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소용돌이 중에도 세 번씩이나 방아쇠를 더 당겨 통감의 급살을 확인했음은 물론, 세 명의 수행 관리에게까지 중상을 입혔다. 그는 러시아 관리와 군인들에게는, 잠깐 놀라게 했을 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다. 총을 내던진 안중근은 환히 웃더니 대한제국만세를 외치고는 러시아 헌병의 수갑에 두 손을 디밀었다. 

“산은 칼이고 물은 날이어서 구름도 처참하여 쉬지 못한다.”

폭력에 유린되는 조국을 이렇게 표현했던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를 죽인 이유를 열다섯 개나 법정에서 제시하면서 죽는 날까지 의연함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성균관 진사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세 가지를 똑같이 잘 했다고 했다. 소년 안중근은 글을 잘 쓰고 활을 잘 쏘며 말을 잘 탔다. 그는 많은 글을 휘호로 남겼다. 그의 궁력은 훗날 명사수가 되는 기초로 쓰였다. 그는 백마를 즐겨 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승마 자세는 완벽에 가까웠다고 했다. 그가 어느 집인가를 방문했다가 주인이 없어 말 머리를 돌렸을 때, 시집 안 간 그 집의 이모가 넋을 빼앗긴 채 그 길로 상사병이 들어 몸져누웠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이미 그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겁 없이 공격했던 독립 투쟁의 선구자였다. 그는 관동도둑부 지방법원 법정에서 말했다.

“이등박문이는 한국 주권 침탈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 자격이 아닌 대한의병사령관으로서 처형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토는 한국 황제를 폐위시켰고, 한국 황후를 시해했으며, 5조약과 7조약을 협박으로 맺었고,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 학살했으며, 철도, 광산, 산림, 전답을 빼앗았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한국인의 교육을 방해했기 때문에 내가 척살한 것인데 나를 죽이는 일본은 무슨 이유를 댈 것이냐?”고 그는 물었다.

메이지 43년 2월 14일 오전 10시 관동도둑부 지방법원 형사 재판관 마나베 주조는 피고인 안중근에게 말했다.

“변호인으로부터 이미 상세한 변론이 있었지만 피고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진술하라.”

안중근은 일어섰다. 그의 어조와 음성은 자상하고 차분했다.

“나는 논고를 듣고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검찰관이 하얼빈에서 다섯 살 난 내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다. 그 후 한 번 본 적도 없는 아비 얼굴을 알 리가 없다. 이 일 하나만 미루어 보아도 검찰관의 논고가 얼마나 엉성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안중근은 검찰의 논고를 조목조목 반박해 나갔다.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판장 마나베는 이따금씩 안중근의 발언을 메모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삶을 즐기고 싶어 하지 않는 자는 없다. 나도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은 십수 년 동안 괴로워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인이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일본의 군인, 농부, 상인, 종교인 등과 대화해 본 적이 있다.

나는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본국에 부모, 처자가 있을 터인데 이같이 타국에 와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군인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에는 간신이 많아서 전쟁을 일으키는 거다’고 말했다. 또 농부는,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할 수 없다. 이토가 문제 있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상인은, ‘한국에는 일본 제품의 수요가 많다고 해서 왔는데 역시 의병과 교통 두절로 장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토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예수교 전도사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나는 전도사에게,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진리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힘으로 개선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인이 이 정도인데 우리 한국인은 어떻겠는가? 어찌 한국인이 자기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를 죽인 이등박문이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중근은, 자신은 이토를 오해하고 있지 않는데 반해 여러분은 이토를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간의 평화를 위해 자신은 이토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그는 최후 진술을 마쳤다.

안중근은 ‘지사는 죽음으로 인을 이룬다’는 휘호를 옥중에서 남겼다. 형장으로 가기 전 어머니가 지어 넣어준 옷으로 갈아입으며 32세의 아들은 굵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5분 후에 죽었다.
 
소년 민필호는 안중근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린 그는 독립 운동이란 것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듣게 된 안중근의 거사는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시켰다. 사실 형으로부터 들은 의병 이야기나 실제로 보았던 의병 아저씨들의 모습에서 현실의 문제를 짚어내기에 그는 너무 어렸던 것이었다.

정 2품 민치헌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에게는 남다른 재모와 덕성이 있었지만, 아직은 냉엄한 국제 정치와 어두운 민족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은 없었다. 게다가 민필호가 6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이 죽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기 때문에 그는 10세까지 서당에서 한학 교육 밖에는 받지 못한 채 성장했다.

그러나 형을 따라 상경하여 경신소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그는 조금씩 민족이 처한 현실을 배워 나갔다. 소년 민필호는 이전에 닦은 한학 실력만으로도 5학년 2학기에 편입되었고 불과 1년여 만에 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아름다운 일송정 해란강과 광막한 만주 벌판과 말달리는 혁명가의 모습을 이따금씩 꿈에서 보고는 했는데, 그 꿈에서 만났던 선구자를 실제 소식으로 듣게 되었으니 감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얀 말을 타고 긴 구두를 신고 허리에는 권총을 찬 혁명가의 모습은 소년 민필호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그는 안중근을 선망했고 동경했다. 아직 그에게는 구체적인 국치의 울분이나 원한 같은 것이 없었다.

“필호야, 독립운동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인내해야만 할 수 있는 거다. 거기에도 인간의 사단칠정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중형 제호는 어린 막내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필호는 실감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형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버지 없이 8년이나 연상인 형이었다. 그리고 중형 제호는 장형 준호 이상으로 어른스러웠다. 그러니 제호는 필호에게 아버지나 진배없었다.

“일단 서울로 가서 소학교 공부를 해라. 그리고 중학교를 마친 후 나라의 독립을 생각해 봐라.”
형 제호의 말은 동생의 가슴에 뚜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머잖아 이 형은 떠난다. 너도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이 어떤 건지를 알게 된다면 형이 있는 곳으로 와라.”

소학교를 마칠 무렵 필호는 경신중학교의 졸업식에 간 적이 있었다. 졸업식은 연동예배당을 빌려 치러졌다. 학교에서는 예배당 정문에 태극기를 게양해 놓았다. 그런데 예배당 집사가 이것을 문제 삼았다.
“하나님 나라의 정문에 속세의 국기를 다는 것은 불경한 짓이다.”
집사는 태극기를 내려 버렸다.

필호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먼저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운동에는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형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이런 일은 일차적으로 교회 집사가 잘못하는 것이지만, 자기들이 당하는 것은 교사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교사를 크게 짓든지 아니면 빌려 쓰지 않든지 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좋은 수가 없다고 필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장을 찾아가 정중하게 건의했다.

“그것은 망국의 예조였습니다. 학생들에게 그런 장면을 다시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 소학교는 교사가 작고 누추하더라도 반드시 교내에서 졸업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소학교 교장 여준승은 그 자리에서 필호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독립 운동가 민필호의 미래 성향을 알게 해 주는 작지만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휘문의숙에 들어간 필호는 교내 신문반에 가입했다. 그는 나이가 어렸고 또 그만큼 키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편으로 그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에는 형의 뒤를 따르려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2학년 봄, 사춘기로 접어들던 그는 한 소녀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남녀 신문반 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서였다. 그녀는 작년에 개교한 한성고등여학교 1학년이었다. 필호는 자기소개 시간에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도애였다. 그녀는, 필호가 일어나 자기소개를 할 때 유달리 눈빛을 초롱거렸다.

집에 돌아온 필호는 최도애의 얼굴과 눈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안중근을 생각해 보았다. 혁명과 낭만을 버무려서 생각했던 어린 시절 일도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생각이라면 자신이 혁명가이고 최도애는 자기에게 모든 걸 바치는 여인이라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혁명가에게는 연인이 없어야 옳은 것이었다. 혹시 여자가 있다고 해도 심복으로 부릴 수 있어야 했다. 그는 자기에게는 혁명의 기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은밀히 인식했다.

연정이 싹튼 것은 필호만이 아니었다. 최도애는, 소년 민필호에게 단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신의 이상형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소년 민필호는 평소 어머니가 말했던 좋은 인상의 조건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민필호의 모든 것이 와락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이성 교제에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최도애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민필호가 자기를 좋아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여름이었다. 민필호와 최도애는 아차산으로 소풍을 가고 있었다. 최도애는 민필호를 두 번째 보게 된 날, 그의 가방에 쪽지를 밀어 넣었었다. 다른 여학생이 먼저 민필호를 좋아하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날 민필호의 표정으로 보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후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민필호를 향하는 최도애의 열정은 높았다. 최도애의 편지는 필호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혁명을 꿈꾸었던 소년 필호는 밤사이 눈빛이 초롱초롱한 한 여학생의 꿈을 꾸고 말았다.

두 사람은 아차산 능선을 따라 10여리 길을 걸었다. 가끔 최도애의 손끝이 필호의 손등에 스치기도 했다. 필호는 최도애에게 아차산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차산성은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삼국의 요충지였다. 아차성의 처음 주인은 백제였다.

“백제가 위례성 도읍지를 선택한 것도 아차산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최도애는 고분고분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400년 동안이나 지켰다. 그러다가 고구려의 광개토왕, 장수왕의 공격을 연속으로 받았다.

“백제의 개로왕은 이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죽음을 당했습니다.”

최도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필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도 있지요?”

필호는 최도애가 한없이 예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네.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도 바로 이곳이군요.”
“관이 안 움직여서 공주가 와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은 광나루까지 걸어와서 인력거를 타고는 동대문에서 내려 전차로 갈아탔다. 긴 여름해가 벌써 인왕산 너머에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묻혀진 사실과 잊혀진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여 진정한 식민지 역사 청산을 도모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묻혀진 사실과 잊혀진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여 진정한 식민지 역사 청산을 도모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안중근 #민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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