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되는 게 두렵습니다

[주장] 현직 교사도 "내 아이 유학보내고 싶다"고 말하는 현실

등록 2008.02.04 17:23수정 2008.02.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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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2월은 새 학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기간입니다. 교사마다 한 해 동안 맡아야 할 학급과 업무가 결정되고, 새 학년 수업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맘때쯤 학교마다 모든 교직원들이 모여 '1년 농사를 준비하는' 세미나 등의 행사를 갖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틀간의 일정으로 새 학년을 준비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였습니다. 강연도 듣고, 주제에 관한 자유 토론도 하며 나름대로 뜻 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올해 모임의 중심 주제는 단연 '중학교 학업 성취도 평가 대책'이었습니다. 다른 사안을 순식간에 묻어버릴 만큼 유일하다시피 한 관심사였습니다. 정권이 바뀐 직후 지역 교육청마다 앞다퉈 이른바 '광역 단위의 학업 성취도 평가와 성적 공개' 방안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모든 학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정기적인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경쟁을 유도하고 학력을 증진시키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명문고(자립형 사립고)와 일반계 인문고를 나누고, 다시 그 안에서 수준별로 학급을 구분하겠다는 것입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꼭 10여 년 전의 방식 그대로입니다.

 

위로부터 추상과 같은 명령이 내려왔으니 일선 학교는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대개 공문이라는 이름으로 하달되는 명령에 대해서 학교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거부했다는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든 관철될 것이니 버텨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답' 찾는데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다... 그 '확실한' 대안은?

 

교사들끼리 모여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학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기실 무척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고민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답’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모두가 맞장구친 ‘확실한’ 대안이었습니다.

 

어차피 성적이 공개되는 시험이니 학교 간 서열이 매겨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우선 초기에 실시될 시험 결과에 전력을 투구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시행 초기에 성적이 나쁜 학교라는 이미지가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굳어지면 이후에는 더더욱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일단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험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관련 문제를 많이 풀어볼수록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문제 풀이 중심의 수업으로 방식을 바꿔야 한답니다. 이미 서점가에는 출판사들의 발 빠른 대응이 시작되었고, 시험이라는 방식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교과서는 안타깝지만 수업 시간에 퇴출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성적이 우수한 소수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부모의 절대적 지원을 받아 ‘제 알아서’ 다 할 것이고 학교의 전체 평균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므로, 우선 중하위권 학생들의 학습 시간을 절대적으로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자면, 보충 수업과 심화 수업을 강화하고, 별도의 자율학습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공부에 동기부여가 제대로 안된 아이들에게 단기간에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반강제적으로라도 책상 앞에 앉게 하는 것 이상의 방책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현재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는, 고등학교 시스템과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서슬퍼런 경쟁 유도했던 20여년 전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건 아니다 싶어 끼어들었습니다. 20여 년 전 제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몇 명 보내는가로 명문과 삼류가 결정되던 시기, 급식소도 없어 도시락 세 개를 싸고 하루 24시간을 모두 학교 울타리 안에서 보내야만 했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한 학년 700명 중에, 시험을 치를 때마다 1등부터 100등까지의 ‘우등생’ 명단과 601등부터 꼴등까지의 ‘열등생’ 명단에 학교 현관 벽면에 붙여놓고 서슬 퍼런 경쟁을 유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초(週初)고사, 주말(週末)고사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시험을 치르는 일정 속에,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까닭은 수업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라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던 그때, 적지 않은 친구가 자퇴해야 했고, 심지어 한 아이의 자살도 옆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서글프다 못해 두려웠던 그때, 다수의 성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큰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학업 성취도 향상을 위한 대책을 고민하기 이전에 과연 성적 공개와 학교 서열화가 불러올 엄청난 파장과 부작용을 상급 관청에 맞서 따지는 노력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헛소리’로 치부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인성 교육과 성적 향상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이야기도 있긴 했습니다. 교사들의 역할 분담 차원에서 인성 교육을 담당할 부서와 성적 향상을 독려할 부서를 나누어 교육과정을 운영하자는 주장입니다. 교육이 칼로 무 베듯 역할을 나눌 수 없다는 것과,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른 모든 것들이 성적 향상을 위한 종속변수가 돼버린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일 뿐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사회 변화를 주도할 창의력과 상상력은 이미 소진되고 없습니다. 교사가 될 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상급 관청의 지시를 관행으로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아래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을 거쳐 만들어낸 대안도 웃분들의 생각에 배치될라 치면 단칼에 잘리고 마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학교에도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틀 동안 '좋은 교육' 위해 머리 맞대고 고민했지만...

 

이틀 동안 교사 모두가 ‘좋은 교육’을 위해 머리 맞대고 고민했지만, 모임이 끝나고 난 후 가슴만 더 답답해졌다는 반응입니다. 학사운영 전체를 완벽하게 과거로 복귀시켜야 하는 마당에 이런 모임 자체가 가당키나 하느냐는 겁니다. 푸념 섞인 말투로 ‘돈만 있으면 아이를 당장에라도 유학 보내고 싶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명색이 현직 교사인데도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전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인 교육 문제가 대통령 당선인이든, 교육감이든 높으신 분 한 마디에 널뛰듯 춤추고 결정되는 게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땅의 많은 교사들의 ‘무기력’도 여태껏 마름 노릇밖에 할 수 없었던 경험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은 아닐는지.

 

성적을 내자면 어떻든 아이들을 더 다그쳐야 한다는 강박과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좌절감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안 있어 새 학년은 시작되지만, 예년과 같은 설레는 마음은커녕 오지 말았으면 싶은 생각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서부원 기자는 중학교 교사입니다. 이 글은 개인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08.02.04 17:2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서부원 기자는 중학교 교사입니다. 이 글은 개인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학업성취도평가 #성적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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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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