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역사팩션] 제국과 인간 14회

1910년대 서울의 책방가 모습

등록 2008.02.04 16:01수정 2008.02.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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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애는 김태수의 시큰둥한 물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김태수 입장으로는 이곳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그녀를 충분히 배려해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최영애가 당돌하게 사람을 보내 일방적으로 만나자고 한 것부터 최영애는 김태수에게 결례를 범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태수는 최영애를 만나 주기는 하되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더 나아가 김태수는 최영애에게 혼인 문제는 ‘네가 나에게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는 점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정혼은 자기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진행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영애는 자신은 지금 굴욕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을 김태수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파혼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요.”
“나는 정혼한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파혼한 적도 없는 겁니다. 그런 질문은 아버지들한테나 해야 합니다.”

“절 좋아하지 않으셨던가요?”
“좋아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영애씨를 매력 있는 여자로 생각했었다고 말해야 정확하겠지요.”

“지금은 아닌가요?”
“매력만으로 어떻게 결혼합니까?”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죠?”
“느낌이 있어야지요.”

“느낌이라구요?”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넋이 빠져 버리는 그런 느낌 말이오.”


최영애는 웃었다.
“태수씨는 의외로 순진하신 데가 있군요?”
“그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전 포기할 수 없어요.”

최영애는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김태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최영애씨, 나를 처음 본 후 얼마 동안은 내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요, 맞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졌지요?”
“네.”
“그 어느 날이 언젭니까? 김태수가 갑부의 아들이란 것을 안 날 아닙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자신을 나락에 빠뜨리는 짓을 스스로 하려는 겁니까?”
“……”

김태수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몸뚱어리를 그렇게 함부로 굴려도 되는 거냔 말입니다.”
최영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김태수는 냉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김태수는 인력거에 올라 오윤정으로 가자고 했다. 최영애의 반응으로 보아 동생인 최도애와 혼인하겠다는 말은 아직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안다면 최영애는 또 어떻게 나올는지? 그는 이래저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너그럽게 보려 해도 당사자는 제쳐두고 혼인을 약정한 양가 아버지의 행위를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영애도 피해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황강이 나무에 매여 있었다. 그녀가 와 있는 것이었다. 김태수는 고동치는 가슴을 느꼈다. 그는 윤기를 머금고 있는 황강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는 그녀가 앉았음 직한 안장에 손을 대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 태수를 알아 본 황강이 긴 머리통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활터 쪽을 쳐다본 그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는 활터를 향해 걸어 올라가 보기로 했다.

먼발치에 그녀가 있었다. 김태수는 하염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지난 후 그녀도 김태수가 온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가 이마에 손을 대 땀을 훔칠 때, 김태수 쪽으로 언뜻 시선이 돌려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오랫동안 활쏘기에만 정신을 쏟았다. 김태수는 가까이 가서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가 자신을 반길 리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햇빛 아래에서도 처음 본 날의 고혹적인 매력을 그대로 발산하고 있었다. 오히려 김태수의 눈에 그녀는 처음보다 더 아름답게 비쳤다. 김태수는 그대로 한 시간 이상을 더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김태수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이유 없이 사람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김태수는 그녀가 활쏘기를 마치고 나오면서 자기에게 한 마디 말이라도 붙여 주기를 내심으로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다시 자기가 먼저 그녀에게 인사하거나 말을 붙이는 것은 예의와 자존심 모두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김태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녀가 가까이 왔을 때 눈을 들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는 인사는커녕 표정의 움직임도 없었다. 소가 닭을 본다는 말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런 얼굴로 그녀는 김태수 곁을 무심코 스쳐 지나갔다. 김태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김태수는 불현듯 명월관으로 갔다. 산월 즉 주옥경이 방에 들어왔다. 김태수는 주옥경에게 친구가 있으면 하나 더 부르라고 했다. 잠시 후 나타난 기생 이름은 산홍이라고 했다. 태수는 평소보다 급히 술을 들이켰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몹시 취하게 되었다.

그는 산월이와 산홍이 사이에 앉아 두 여자의 손을 만졌다. 그는 가야금 연주를 마다했다. 여자의 따뜻한 촉감만이 그를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산홍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주옥경이 산홍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일 인사 이 모가 산홍에게 5천원을 주며 소실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5천원이면 집을 두세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돈을 건네는 이 모에게 산홍은 싸늘하게 말했다고 했다.
“기생 줄 돈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들에게 주십시오.”
김태수는 산월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

집에 돌아온 김태수의 심경은 착잡했다. 그는 답답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대조적으로 대하는 두 여자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두 여자 모두 자기에게 비슷한 것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자괴감 같은 것이었다. 김태수는 취한 상태였지만 정신을 차려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는 결론을 내보았다.

아무리 자기에게 무심하고 냉담하다고 해도 활터의 그녀가 최영애보다 정당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최영애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건 사람을 돈으로 본 것이었다. 반면 활터의 그녀는 자신에게 냉혹했지만 자신을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수는 밀려오는 슬픔과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최소한도 그녀와 이름 석 자 정도는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름조차도 부를 수 없는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새로이 체험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이라도 한 번 부르고 싶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히죽 웃었다. 그는 앞으로 그녀의 이름을 활터 이름인 오윤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윤정…. 아쉬운 대로 일단 사람 이름 같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김태수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창 너머에 엄청나게 밝은 달이 올라와 있었다.

오미자 빛 연애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하지만 대보름이었다. 가난한 농촌 사람들의 표정도 이 날만은 환했다. 하물며 끼니 걱정이 없는 도성 시민들의 마음은 더욱 밝았다. 그들 중에는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민필호와 최도애도 그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마음 졸이며 오늘 하루를 기다려 왔다. 그들은 광통교 다리밟기 축제에 가기로 한 것이었다. 필호는 늦은 저녁부터 시작되는 다리밟기에 앞서 최도애와 책방길을 다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이 되기 전에 만나기로 했다.

필호는 수표교 난간에 기대어 도애를 기다렸다. 그녀는 두툼하면서도 화사한 빛깔의 장옷을 쓰고 나타났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희고 하얀 콧날만 보였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도애는 볼 때마다 다르게 처녀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필호의 얼굴도 이제 소년티를 벗고 있었다. 빛나기만 하던 그의 눈빛에는 깊이가 자리 잡았고 손가락의 마디도 꽤 굵어져 있었다.

그 시절 서울의 책방들은 수표교에서 종각까지의 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뿌리 깊은 반상의 신분 질서는 책방까지도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이른바 양반 책방에서는 오로지 책만 팔았지만 속칭 상놈 책방에서는 붓, 종이, 망건, 담배, 쌈지 등의 잡화도 팔았다. 양반 책방의 주인은 갓을 쓰고 장죽을 물고 있었다. 고객이 좀 무식해 보이거나 외국인이라면 한층 도도하고 오만하게 행세했다. 귀한 책은 다락에 숨겨 놓고 있다가 인상이 좋은 조선인에게만 내 주었다고 한다.

상놈 책방에는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기도 하는 세책가(貰冊家)가 따로 있었다. 가난하지만 유식한 여성 중에는 양반집 마님에게 책을 읽어 주는 책비(冊婢)가 있었다. 세책가는 책비를 많이 거느려야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북촌 세도가에 책을 대는 세책가는 양반 행세를 하려 했고 대궐에 책을 납품하는 세책가는 정 9품 벼슬로 우대 받았다고도 한다.

이미 조선에 정착하고 있는 일본인의 수는 20만을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보다 더 급증하고 있는 인구는 기독교인이었다. 필호와 도애는 성서 책방 앞에서 너무도 큰 규모에 깜짝 놀랐다. 성서를 파는 사람들은 여성 기독교 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정결하고 세련된 복장과 단정한 자세로 성서를 팔고 있었다.

필호가 도애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펜젤러라는 목사가 새로 낸 책방이랍니다. 요즘 번역 성서는 나오기가 무섭게 품절된다지요?”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제 친구들은 성서를 다 가지고 있어요. 이화학당을 졸업한 우리 언니는 여러 권이나 가지고 있지요.”
“이번에 경주에서 발견된 불교 사찰은 정말로 대단하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바위 속에 절을 만들 수 있었는지 경이롭습니다.”
필호는 최근에 발견된 석굴암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도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우편국 직원이 발견한 것도 재미있더군요.”
“그렇습니다. 아무튼 불교는 다 망해 가는데 기독교는 불길처럼 일고 있는 것은 좀 이상한 일입니다.”
도애는 필호의 말에 아무런 응수도 하지 않았다.
“저는 <소년> 지가 폐간된 것이 참 서운합니다.”
이번에는 필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데에, 두 사람에게는 작은 차이가 있음이 분명했다. 도애는 불교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도애는 전형적인 개화 집안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필호는 형 제호의 영향을 받아 현상의 표면과 이면을 함께 파악하는 안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소년>은 최남선과 이광수가 주체가 되어 간행하는 청소년 교양지였다. 필호는 문제의 원인인 제국주의 침략은 제쳐 두고 개화와 무실역행만이 살길이라는 식의 <소년> 지가 갖는 논리의 공소함을 알아 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을 재발견함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대하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틀에 한 번씩 새로운 이야기가 올려집니다.


덧붙이는 글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을 재발견함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대하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틀에 한 번씩 새로운 이야기가 올려집니다.
#오윤정 #책비 #수표교 #오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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