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침을 삼키더니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더 큰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할 것 같소.”
신규식은 달리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내가 늙어서 점은 잘 못 봅니다만 관상은 아직도 좀 본다고 자부하고 있소이다.”
노인은 관상의 8단계를 말했다. 관상은 사람의 도덕적 품격과 관련되지만 미래의 성취 여부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관상에는 사선(四善)과 사단(四短)이 있다고 했다. 사선에는 위(威), 후(厚), 청(淸), 고(古)가 있는데, 위와 후를 겸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했다. 사단에는 고(孤), 박(薄), 악(惡), 속(俗)이 있는데 악과 속을 겸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고 덧붙였다.
“공은 청(淸)이 강하고 고(古)가 약간 있소. 고(古) 대신에 후(厚)를 만든다면 뜻을 성취할 수 있을 듯하오.”
주막집 노인은 신규식이 아침도 들지 않고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문 밖까지 배웅했다. 그는 며느리를 시켜 준비한 도시락을 신규식의 말에 묶으라고 했다.
“공은 선구자입니다. 앞으로 공을 따라 일하러 가는 사람을 이곳에서 자주 볼 것 같은 기운이 감돕니다.”
도시락은 정성이 가득 담긴 압록강 김치밥이었다. 압록강 김치밥은 단동의 고랭지 배추에, 잣과 꿀과 사과와 대추와 천마와 인삼과 피나무와 오미자를 곁들여 현미밥과 버무린 것이었다. 노인은 보리차까지 챙겨 놓았다. 신규식은 구수한 온기가 남아 있는 보리차를 마시며 마음속으로 노인과 며느리에게 감사했다.
신규식은 단동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는 상해에 가기까지 가능한 대로 중국의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는 요양을 거쳐 심양에 가서 또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 일찍 그는 심양을 출발하여 북경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관학교 동기생으로 북경에 망명 와 있는 조성환을 찾아갔다. 그는 조성환에게 중국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다. 조성환은 신규식의 열정과 학구열에 감동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신규식에게 밤새 얘기해 주었다.
서울에서 이별하고 삼천 리나 떨어진 이역에 와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두 사람의 마음은 쓸쓸하고 아팠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헤어졌다.
“상해에서 다시 만나세.”
북경에서 조성환과 작별한 신규식은 불현듯 한국의 공사관이 있던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는 길을 물어 찾아갔다. 처음 그는 프랑스 동방은행 건물을 한국 공사관 건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 공사관이었던 건물은 그 옆에 따로 있었다.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가 황해의 수면으로 마지막 빛을 뿌리고 있었다. 20세기의 초반, 한여름 저녁 무렵, 조선 독립 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가 상해항을 바라보며 펼쳐지고 있었다.
한 척의 여객선 갑판 위에 삼십을 넘긴 듯한 사나이가 저녁 경치에 취해 시 한 수를 읊고 있었다.
흰 구름 하늘 끝에 고국이 있네.
유장한 강물과 산줄기 너머
차마 뒤돌아 볼 수 없는 그 땅으로
석양과 황혼이 흥망을 말하고 있네.
외모로 보아 그는 중국인이 아니었다. 카이저 식 수염과 단정한 턱 밑 수염, 그리고 흘겨보는 눈길, 눈빛만으로 그는 범상치 않은 유랑자였다. 그는 분노와 원한을 감추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내면에서 울부짖고 있는 듯, 중년 신사는 석양의 강물 외에는 어느 곳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신규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11년 5월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청나라 왕조의 쇠약증을 느끼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그는 북경이 아닌 상해를 선택한 자신의 판단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가 상해를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물론 직접 힌트를 얻은 것은 한양의 말죽거리였다.
그는 한양 대 말죽거리와 한반도 대 상해의 등식을 만들어 본 것이었다. 상해는 조선 중심부에서 직선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비행기가 있었더라면, 편도 70분 정도면 이를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두 지역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작고 얕았다. 황해는 한양과 말죽거리 사이에 놓인 한강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상해에 독립지사들이 많이 모여든 것은 상해만이 가진 몇 가지 특성 때문이었다. 우선 상해는 중국 혁명의 핵심 지역이었다. 게다가 상해는 근대화, 서구화에서 앞서 가는 도시였다. 이곳의 정치적 동향은 대륙 전체에 파급되었다. 중국 사상계에 무정부주의를 유행시킨 것도 상해에서 번역, 출간된 책 한 권이었다. 상해는 도쿄, 홍콩과 함께 혁명 출판물의 기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상해는 중국 신해혁명의 중심지였다. 진기미, 송교인 등의 혁명 인사들이 상해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중국 혁명대는 정치, 외교뿐 아니라 군사, 경제면으로도 상해를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혁명에는 자금 조달이 아주 중요한데, 상해에는 상공업으로 기반을 닦은 중산층 이상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명분 있는 곳에 돈을 쓸 줄 아는 문화적 전통이 있었다.
다음으로 상해는 세계 해상 교통과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구미인들의 내왕이 잦고 거주민의 숫자도 많았다. 이것은 국제적 여론 형성과 정보 수집에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더욱이 장차 전개될 외교 활동 전개에 큰 이점이 될 것이었다. 실제로 임시정부 초기의 주된 방략은 외교 중심으로 실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상해에는 외국 주권이 행사되는 조차(租借) 지역이 만들어져 있었다. 1842년 구미 열강들은 남경조약으로 통상 항구를 확보했다. 물론 조차 지역은 열강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가 경쟁하다 보니 서로 명분을 내세우게 되어 외면으로나마 자유, 평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상해에는 250만에 이르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 타원 형태로 된 이 도시는 프랑스 조계, 영국 조계, 일본 조계 및 기타 몇 개의 조계가 더 있었는데, 프랑스 조계만 원래대로 남고 나머지 조계는 합해져 공동 조계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조계는 동서로 길쭉한 형태였다. 이 조계는 1866년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독자적으로 정치하며 다른 나라의 공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 조계는 한국 독립 운동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물론 이것도 영국과 일본을 견제하려는 그들의 정책이 반영된 결과였을 터이었다.
프랑스 관리들은 한국 동포와 중국인들의 관계를 도와주었고 일본 정보요원의 침투를 막아 주었으며 한국 동포들의 직업도 적극적으로 알선해 주었다. 특히 프랑스 조계 경찰의 부책임자인 사비에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에 대해 권한 내에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 주었다.
신규식이 상해를 선택한 것은, 이런 모든 것을 읽는 감각과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훗날 그가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을 초빙할 수 있었던 것도 장소가 상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신규식이 상해에 왔다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작업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었다.
김태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하인을 데리고 다시 활터에 가서 ‘오윤정’의 집을 알아 놓게 했다. 그녀의 집은 북촌 꼭대기에 있는 작은 기와집이라고 했다. 그는 돈을 들여 사람을 샀다.
“그 숙녀 분의 신상을 알아 오는 데 며칠이면 되겠소?”
“3일이면 되겠지만,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이니 일주일의 기간만 주신다면 충분합니다.”
“좋소.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소상히 알아 오시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숙녀 분이 모르게 해야 된다는 것이오.”
“알겠습니다. 아마도 3일 후면 나리를 다시 뵐 수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하고 나간 자가 3일은커녕 일주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열흘이 넘어서야 나타난 밀정의 보고를 듣고 김태수는 어이가 없었다.
“조선 여자 아니면 일본 여자입니다.”
김태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한양 땅에 있는 여자치고 조선 여자 아니면 일본 여자 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곧 울적하고 허탈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와 말 한마디 못해 본 채, 그녀를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김태수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동생 도애와 혼인을 원한다는 말이 최영애의 집에 전달되었나 보았다. 그러자 자매가 동시에 반대 의사를 날카롭게 표시한 모양이었다. 최영애는 악을 쓰며 미친 듯이 행동했고 최도애는 방문을 잠근 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수는 아버지에게 도애를 설득하는 일은 자기가 할 테니 걱정 말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신뢰를 잃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혼인에 관심 있는 시늉이나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대하팩션 <제국과 인간>은 이틀에 한 번 짝수일과 31일, 한 달에 16번 게재됩니다.
소모적인 친일청산 논쟁보다는 영혼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그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아름답게 극복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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