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반처럼 둥근 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정월 대보름입니다. 초저녁부터 전등이 없는 부엌과 뒷간 등에 등잔불을 켜놓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선하네요.
어머니는 열나흘 밤이면 건너 동네 사는 ‘이빨빠진쟁이 할머니’를 모셔다, 마른명태와 떡시루를 소반에 올려놓고 신작로에서 고사를 지냈습니다. 떡시루 도둑 때문에 형 친구들이 보초를 서기도 했지요. 할머니의 주문이 궁금해 벌벌 떨면서 지켜봤지만, 저와 형 이름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겠더라고요.
대보름엔 하루에 아홉 끼를 먹고, 반찬도 주로 나물과 차가운 탕 종류를 먹지요. 그 외에도 부럼 깨기, 귀밝이술 마시기, 더위팔기, 달집태우기, 달맞이, 쥐불놀이 등의 세시풍속이 전해져옵니다.
‘신라시대부터 정월 대보름을 설날 이상의 명절로 여기고 행사도 다양했다’라는 내용을 역사 시간에 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네 어른들도 대보름의 의미가 설날 못지않다는 말씀을 하셨고요.
제가 어릴 때는 대보름까지 설날 분위기가 살아 있었습니다. 풍장 꾼들의 장구와 꽹과리 소리도 한몫했지요. 세배도 지금처럼 며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월 한 달 내내 다녔습니다. 보름이 지나서야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세배하러 오는 것을 봤으니까요.
50-6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백가반(百家飯)’ 풍습을 즐겼습니다. 보름날 아침이면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각설이 차림에 숯검정을 바르고 장타령으로 흥을 돋우며 쭈그러진 양재기를 들고 왔던 종성이네 엄니를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옵니다.
연날리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등 재미있는 놀이가 많았는데, 고소한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에 시루에 찐 찰밥을 싸먹을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배고프던 시절에 마음껏 찰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풍장꾼들
설과 함께 풍물패가 등장했는데 ‘풍장꾼’이라 불렀습니다. 도깨비 가면을 쓴 말뚝이는 요즘의 탤런트만큼 인기가 좋았지요. 목총을 이리저리 겨누며 히죽히죽 웃는 데퉁스런 모습에 울던 사람도 웃을 정도였으니까요.
종이꽃 고깔을 쓴 풍장꾼들은 말뚝이와 날라리(태평소)를 앞세우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악귀를 쫓아주었는데, 저희 집에도 들른다는 연락이 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정결한 소반에 100환짜리 지폐 몇 장과 뒤주에서 퍼온 쌀 위에 촛불을 켜고 두 손을 모읍니다.
소반 위의 수북한 쌀과 현금에 신이 나는지 마당과 부엌, 샘가와 곳간 등을 다니며 흥겹게 한 판을 벌입니다. 신명나는 장구와 꽹과리 소리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마당은 이내 공연장으로 변하지요.
귀밝이 술에 아침부터 거나해진 정복이 아저씨는 “어~엇차! 얼씨구~” 하면서 풍장꾼들 속으로 파고듭니다. 디딤 걸음으로 마당을 돌면서 “구신~ 잡신은 물러가라이~잉!” 하며 흥을 돋웠습니다.
말뚝이와 장난하는 재미로 배고픈 것도 잊고 친구들과 함께 풍물패를 따라다녔지요. 오십 년이 되어가지만 흥겹고 정겨웠던 당시 풍경들이 눈앞에 그려지고 ‘삐이삐~ 삐리리’ 하는 날라리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합니다.
소방차가 출동했던 달집태우기
겨울철 불놀이 중에 깡통 돌리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못으로 구멍을 낸 깡통에 솔방울 몇 개와 장작개비를 넣고 관솔로 불을 지펴 어깨가 아프도록 돌리다 하늘을 향해 던지면 은하수를 뿌려놓은 듯했거든요. 여럿이 동시에 던지면 불야성을 이뤘는데 지금의 불꽃놀이보다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골목 앞 운동장에 웅덩이를 파고 달집태우기를 하다 소방차가 출동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동네 어른들이 출동했던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잡혀갈까봐 조마조마하면서도 다른 동네 친구들에게는 자랑거리였지요.
불쏘시개로 쓰는 루핑과 조선소에 굴러다니는 잡목, 오래된 판자 울타리에 길례네 아버지에게 솔방울이 주렁주렁 달린 소나무와 짚단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을 수밖에요.
지금도 고향 친구들과 술자리가 벌어지면 소방차 출동으로 온 동네가 난리를 치렀던 그날의 얘기들이 가장 맛있는 안줏거리가 됩니다.
어머니에게 더위 팔고 혼난 사건
보름날 아침에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 대답했을 때 "네 더위 내 더위 먼저 더위"라고 하면 그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더위팔기’ 풍습이 내려오는데,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니 더우 내 더우 문지 따우”라고 했습니다.
더위를 어른에게 팔았다가는 흠씬 줘 얻어터지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너무 어린 사람에게 팔아도 못난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촌 형님이 10년이나 어린 조카에게 더위를 팔고는 자랑하다 놀림을 당하는 걸 봤거든요.
더위를 팔아야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을 100% 믿었던 시절, 누님과 동생, 앞집의 원식이도 불렀지만 대답은커녕 더위를 사기만 했습니다.
답답하고 급한 마음에 “엄니~” 하고 불렀더니 부엌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왜그랴~”하시기에 “엄니 더우 내 더우 문지 따우” 했다가 아버지에게 된통 혼났고, 형과 누님에게 어른이 되도록 놀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풍요와 정이 넘치는 추억이 되었지요.
설날과 대보름에 있었던 일들을 아스라한 추억이라고만 하기에는 자랑스러운 세시풍속을 하나씩 빠뜨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해서 건강한 문화와 풍습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도 의무이자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보이(http://www.newsboy.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2.20 09:25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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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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