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2월 24일 오후 고 김훈 중위 추모 미사가 열린 명동 가톨릭회관 3층 교육실.
오마이뉴스 김덕련
이처럼 유족과 군 당국 사이에서 사인에 대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던 98년 9월경. 김훈 중위 사건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재미 법의학자인 노여수 박사의 법의학적 소견이었다.
당시 노 박사는 미국에서 8000여 건에 이르는 사체를 부검했고, 특히 권총 자살 및 타살 사건에 대한 시신 1000여 구를 부검한 30년 베테랑 법의학자였다. 노 박사는 김훈 중위가 타살되었다는 11가지의 근거를 제시하며 국방부의 기존 발표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김훈 중위가 몸부림 중에 오른쪽 손에 찰과상을 입고 머리 위를 얻어맞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김 중위는 뇌진탕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고 권총 자살의 일반적인 위치인 오른쪽 측두부에 총알을 맞았다. 그러나 총상입구와 머리 속에 생긴 총알의 진행방향은 권총 자살 때 생기는 총상의 특성과는 일치하지 않는다.우울증을 겪지 않았다는 점, 이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없다는 점, 권총에 지문이 묻어있지 않다는 점, 자살쪽지가 없었다는 점, 총을 쓰는 손에 발사된 탄환 잔여물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점 등은 더욱 더 자살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해준다."이 같은 노여수 박사의 새로운 법의학적 소견이 98년 9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보도되면서 국민들 속에서 김훈 중위 사망 의혹은 증폭되었다.
새로운 폭로가 불러온 의혹... 그러나 특조단은 사기단?그러던 98년 12월 3일. 당시 판문점 경비대대의 부소대장이 공동경비구역인 JSA 근무 중 북한군과 접촉하기 위해 수차례 휴전선을 넘나들었다는 폭로가 국회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남북을 넘나들었던 그 부소대장이 그동안 자·타살 논쟁의 주인공이었던 김훈 중위 소대의 부소대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언론은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고,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국방부였다.
98년 12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방부에 특별 지시를 내렸다. 국방부 창군 이래 군대 내 사망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 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이 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은 국회 답변을 통해 "유가족과 언론이 제기하는 모든 의혹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80년 이후 군내 의문사에 대해서도 모두 수사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제야말로 모든 의혹이 속시원하게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우리는 출렁거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불과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특별 합동조사단에 걸었던 우리의 기대는 순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특조단을 구성하여 재수사하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도는 "많은 국민들이 잘못 알고 있는 타살 의혹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하라"는 지시였음을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였다. 그것은 정말 큰 차이였다. 진상 규명이 아닌 기존 의혹에 대한 '해명'을 위주로 조사가 진행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예상처럼 특조단의 조사는 중립성과 객관성이 결여된 채 진행되었다. 약속했던 조사 과정의 공정함과 투명성 역시 전혀 충족되지 않은 채 특조단의 실망스러운 행보는 계속되었다. 우리의 기대는 처절하게 무너졌으며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99년 1월 14일 개최된 법의학자 토론회에서 항변하다 개처럼 끌려나오는 것뿐이었다. 참담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씁쓸한 기억이다.
나는 아직도 진실에 목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