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대가 디딘 발자국은...

[서평] <백범어록>

등록 2008.02.26 11:05수정 2008.02.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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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어록 서거할때 꺼지 평화통일의 희망을 않았던 백범의 마지막 말과 글을 도진순이 엮고 보탰다. ⓒ 돌베개

▲ 백범어록 서거할때 꺼지 평화통일의 희망을 않았던 백범의 마지막 말과 글을 도진순이 엮고 보탰다. ⓒ 돌베개

참여정부가 막을 내리고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선거철마다 한결같은 어조로 '국민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민의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지만 막상 당선되고 나서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제쯤이면 아름다운 뒷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할 대통령을 보게 될까?

 

지금도 여전히 민의와 국민을 대표한다는 지도자들이 그저 개인의 영달, 자신이 속한 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민의는 언제나 뒷전이고 어쩌다 모여앉아서도 부질없는 싸움이나 해대고 있다.

 

시간의 역사를  살아 낸 흔적이 각인되어 훗날 준엄한 역사의  심판대에 서게됨을 기억한다면 누구나 옷깃을 새로 여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돌이킴이 없어 늘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우리는 과거 36년간 식민통치를 받은 사실이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정신적 사대주의에 빠져 민족의 자긍심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과거를 말끔하게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다.

 

개인의 사심을 버리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백범 김구 선생 정신세계 전반을 엿볼 수 있는 <백범어록>이 도진순 교수에 의해 새롭게 엮여졌다.

 

엮은이는 서문에서 "<백범어록>은 상당 부분 냉전의 질곡을 넘어서고 분단과 통일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어 <백범일지>와 달리 쉽게 접근되지 못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항일독립운동가로서 백범만이 아니라, 분단 전후 최후의 백범 모습과 그 못다 펼친 만년의 꿈은 일지가 아닌, 어록을 통해서만 총체적으로 조명 될 수 있다는 엮은이의 말은 일리 있다.

 

<백범어록>에는 1945년 11월부터 백범이 서거한 1949년 6월까지 공식적으로 언급된 내용들과 덧글, 유고 2편이 중요한 원문 자료와 함께 정리되어 있다.

 

백범은 일구월심 일제와 외세로부터는 철저한 민족의 자주독립을, 남북을 향해서는 이념과 정치 체제를 넘어선 단일국가로의 평화통일을 염원했다. 민족보다 개인의 정치적 야망이 앞서 끊임없이 주도권 쟁탈전을 일삼던 이들에게 백범은 낮은 자, 섬기는 자, 몸으로 실천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 동지들에게  쟁두운동(爭頭運動)을 피하고 쟁족운동(爭足運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도자의 덕목인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헤게모이 쟁탈전이 아닌  희생과 관용, 높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 지도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발로 뛰는 심부름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백범은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가리 싸움과 다리싸움

우리 한국독립당 동지들은  쟁두운동(爭頭運動)을 피하고 쟁족운동(爭足運動)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옛적부터 오늘까지 쟁두로 말썽이 많았다. 말썽이 많으면 일이 안 된다. ‘쟁두‘는 대가리 싸움인데 대가리 싸움은 영수(領袖)싸움 곧 헤게모니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지금 국내에 들어와서도 보면, 서로 일을 같이 하기로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도 인사 문제에 의견이 맞지 않아 분열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 날뛰는 그들은, 우두머리 지위가 자기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어제 같이 맹세했던 것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분열되는 것을 보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분규는 흔히 대가리 싸움에서 생긴다. 우리 동지들은 대가리 싸움을 경계해야 한다.

 

속담에 “백족지충(百足之蟲)은 지사불강(至死不僵)”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백 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는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민주주의적이고 또 조직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민중의 토대 없이 대가리 되는 영수가 있을 수 없고, 하층의 기본 조직 없이 중앙의 영도권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쟁족운동을 하자. 남들은 대가리 싸움에 열중하지만 우리는 다리 싸움에 열심히 하자. 남들은 높은 일을 하지만 우리는 낮은 일부터 열심히 하자. 내 발로 직접 걸어 다니며

남이 할 사이도 없이 서로 다투어 일하자. 남들은 자동차로 다니지만 우리는 부모가 지어 주신 내 발로 뛰어다니며 일하자. 실천(實踐)이란 말의 밟을 천(踐)자는 발족(足)변에  있다. 모든 일을 발로써 실천하자. 그리하여 우리는 몸소 땀 흘려 조국을 건설하자. - 백범어록 중

 

기회만 되면 자기를 내세우고 머리가 되고 싶어 하고 강한 자 앞에 한없이 비굴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소인배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백범 철학에 담긴 ‘실천론’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선두에 선 지도자가 아니라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민중의 힘임을 아는 백범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민중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평화통일에의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삼팔선을 넘어가던 백범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교장에 칩거하여 마음을 다스리며 써 내려가던 이양연의 시를 떠올리며 비록 뾰족한 돌맹이가 여기저기 숨겨진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지라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곧은 발걸음을 내딛겠노라고 다짐하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지어다.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 - 이양연

 

얼마 전 한미FTA 반대 전도사로 불려지는 정태인씨가 저 시를 인용해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지라도>라는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앞서 역사를 주도해 간다고 믿는 지도자들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양연의 저 시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다면 시간의 역사위에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는 일이 적어지련만.

덧붙이는 글 | 백범어록/김구 지음. 도진순 엮고보탬/돌베개/1,3000원

2008.02.26 11:0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백범어록/김구 지음. 도진순 엮고보탬/돌베개/1,3000원

백범어록 - 평화통일의 첫걸음, 백범의 마지막 말과 글

도진순 엮음,
돌베개, 2007


#백범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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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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