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경기도 군포시 한세대학교 대학원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현황과 전개’란 주제의 학술세미나에서 나온 학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세대 미디어특성화사업단·한세대미디어영상학부·한국방송비평회가 공동 주최한 이날 세미나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한국사회에 융합될 수 있도록 미디어가 매개체가 돼야한다는 인식에서 기획됐다.
그동안 시민·종교단체 등에서 다문화 정책의 문제에 대한 지적들이 나오긴 했지만 학계에서 미디어 분야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연구와 논의를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문화와 한국사회’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제작’ ‘지역사회와 다문화 콘텐츠’ ‘문화적 다양성과 미디어 콘텐츠’ 등 4개 분야로 나눠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국내 방송사들의 다문화 콘텐츠 개발과 공익적 차원의 지원정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수는 이미 1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5000만명으로 기준할 때 2% 수준에 해당하는 수치다.
김세훈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은 ‘다문화와 한국사회’란 발제를 통해 “외국인노동자·국제결혼·국제교류 등의 증가로 국내 거주 외국인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다문화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외국인노동자 증가와 함께 국제결혼 비율은 1990년 1.2%(4710건)에서 2006년에는 11.9%(3만9690건)으로 크게 증가했으며, 특히 농촌지역의 경우 국제결혼 비율이 27.4%로, 결혼가정 4가구 중 1가구가 국제결혼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한 “저출산·고령화의 영향에 따라 2020년을 정점으로 전체 인구가 급감하고, 이는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외국노동인력을 수입하는 상황이 올 것이며, 이민자와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의 다문화 환경 변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연구위원은 “우리 사회에 외국인과 외국문화의 유입은 더 이상 작은 부분이 아니다”면서 “하지만 다문화 상황에 대한 대응책은 다양성과 통합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지 못하고,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차원으로 제한돼 수립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따라서 “다문화 사회에 대비한 정책은 문화간 이해와 소통에 강조점을 두고 사회적 통합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적 이해-소통 위한 방송 다문화 콘텐츠 개발 이뤄지지 못해
그러나 이처럼 우리 사회의 급속한 다문화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인 미디어 분야, 특히 방송의 다문화 콘텐츠 개발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최유진 박사(동국대 문화콘텐츠 R&D센터 연구원)는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제작’이란 발제에서 “현재 각 방송사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의 질적 평가지수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문화적 다양성(다문화) 가치는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다문화 미디어 제작 차원에서 시급한 개입방식은 현재 한국의 TV방송이 가지는 다양성 정도를 정확하게 평가해 다각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의 지수 활용이 요구된다”면서 “이런 인식의 기반위에서 지난 2004년부터 문화연대의 문화다양성지수(CDI) 개발노력은 미디어 콘텐츠 제작의 분위기 쇄신을 위한 시도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문화연대가 지난 2004년 9월 진행한 CDI를 통한 한국 TV프로그램의 문화다양성 수준을 분석한 결과 5점 기준으로 평균 2.22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사별 문화다양성 구현 정도는 KBS, EBS, MBC, SBS 순으로 평가됐다.
프로그램 장르별 문화다양성 평가에서는 세대(2.50)와 성(2.49), 계급과 지역(각각 2.28) 순으로 나타났으며, 인종·민족(1.95)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가장 미흡했다.
이와 관련해 최 박사는 “방송사들이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실현과 공익성의 가치를 위해 상품성과 수익성 등 현실적 효과를 쉽게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 과정에서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제작 논리는 시청률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홍숙영 교수(한세대 미디어영상학부)는 ‘지역사회와 문화 콘텐츠’란 발제에서 “국내의 다문화 정책이나 프로그램은 외국인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돕거나 지원하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게 많다”면서 “지역 사회에서 외국인에 대한 이해와 실질적인 지원보다는 단발적인 일회성 이벤트 행사가 주를 이루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특히 “지역방송의 경우 지역사회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담아내는데 그 존재의 의미가 있으나 아직까지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지역의 특수성과 지역주민의 새로운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역방송은 현재 매체가 다양해지고 통신과 방송의 융합이 진행되면서 정체성 혼란과 함께 경제적·기술적 위기와 함께 콘텐츠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국내 거주 전체 외국인 가운데 23만4000여 명이 몰려 있는 경기지역의 경우 지역방송에서 자체적으로 다문화 프로그램을 고정 편성한 곳은 찾아볼 수 없다“면서 ”지역사회 변화를 수용해야 할 지역방송이 다문화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공중파 라디오 방송인 <경기방송>의 경우 과거 중국 연변방송국과 제휴로 국내 거주 중국동포를 위한 명절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했고, ‘베트남 신부의 사연공모전’을 통해 이주여성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을 뿐, 후속 프로그램 제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평가다. 경기지역의 케이블TV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일부 방송국의 토론 및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이주민들의 문제를 다뤘으나 단발성 프로에 그쳤다.
<경인방송>이 사라진 3년만인 지난해 12월, 새로 개국한 경인지역의 유일한 지상파 TV 방송인 <OBS> 역시 아직은 난시청지역이 많은데다, 프로그램 내용에도 지역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경숙 교수(한국디지털대 언론영상학과)는 현재 KBS1 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러브인 아시아>를 통해 다문화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짚었다.
이 교수는 ‘문화적 다양성과 미디어 콘텐츠’란 발제에서 “<러브인 아시아>는 이주여성의 삶을 TV를 통해 공론화하는데 기여했으며, 공익적 프로그램이라는 차원에서 비교적 다른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보다 이주여성의 삶을 근접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포맷에 오락적 요소들을 가미하고, 멜로드라마의 특징들을 차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면서 “이런 서사 구조는 다양한 국가에서 이주한 주인공들의 문화적 차이는 드러나지 않고 농촌에 시집 온 아시아 이주여성이라는 동질성만 부각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이 프로그램은 공적 커뮤니케이션 체계 속에서 ‘이산’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개인화 또는 낭만화 하는 등 지나치게 ‘분홍빛 포장’을 하고 있다”면서 “이는 이주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개발 유도 위해 공적기금·정책지원 필요”
이날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다문화 시대의 미디어 콘텐츠 개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는 분위기였으며, 콘텐츠 개발을 유도할 수 있는 지원방안들도 제시했다.
최유진 박사는 “공공성과 문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방송 제작자와 수용자들에게 인식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법적 제도화를 통해 문화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신중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그러나 “제도화는 규제가 아닌 제작자들의 창조적 역량을 보장해주는 방향이어야 한다”면서 “정책적으로 문화 다양성 지수가 높은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방송 제작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호주처럼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 제작은 이론적 차원을 넘어 이제 현실의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호주는 ‘콘텐츠 의무편성 규정’을 정하고 문화와 인종적 차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디어 정책을 실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광옥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도 “방송 드라마 등에서 조금씩 문화 다양성의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문화 다양성 지수가 높은 프로그램에 대해 공익자금을 지원하면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정책적으로 시청료와 진흥자금의 지원방법을 바꿔 공중파 방송이든, 케이블방송이든 가리지 말고 공익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에 지원금을 주면 공익·공공성 프로그램이 증가하고 질적 수준도 향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숙영 교수는 “지역방송이 경제적·기술적·콘텐츠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의 개성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며, 변화된 우리 사회의 다문화 현상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지역 사회와 시청자가 다문화 미디어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공적 기금과 정책적 지원이 뒤따라야 하며, 지역방송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다문화 콘텐츠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창의적인 다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해 자치단체와 미디어기업, 학계와 시민문화단체 등이 서로 협력할 것을 주문했다.
일부 참석 교수들, 현실적 접근방법 등에서 인식차이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날 주제별 발제에 이어 진행된 토론에서 일부 참석 교수들은 현실적 접근 방법과 다문화의 개념 등을 놓고 발제자들과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김유정 교수(수원대 언론정보학과)는 “지역성과 다문화는 우리나라 방송에서 소외된 영역”이라며 “중앙 집중식 문화와 단일 문화 추구에 익숙한 수용자와 방송문화에 지역성과 다문화를 강조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쉽지 않는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특히 “지역방송에서 다문화 문제를 어떻게 반영해 성공적인 수익모델로 개발해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며 “하지만 다문화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인터넷방송과 소규모 저출력 방송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김혜숙 교수(건양대 EFL 영어과)는 “다문화가 다인종에 기초한 다양한 문화적 현상만이 전부인 것인 양 인식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우리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자들의 다양성도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만기 서강대 외래교수는 “다문화 환경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크게 염려할 수준은 아니다”면서 “이 보다는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내국인의 우선 통합을 위한 방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8.03.24 17:06 | ⓒ 2008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수원을 비롯해 경기지역 뉴스를 취재합니다.
제보 환영.
공유하기
"다문화 시대, 미디어 콘텐츠 개발 시급하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