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나 미국 데려다 주고 죽어"

시어머니와 손자를 함께 돌보는 이웃 형님 이야기

등록 2008.04.05 18:55수정 2008.04.0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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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에는 내가 존경하는 이웃 형님이 한 분 계신다. 어지간하면 언니라고 부르겠지만 나보다 무려 스물다섯 살이나 연세가 많으셔서 형님이라고 부른다. 언제나 웃는 얼굴에 신앙심도 좋으시고 말씨 또한 부드러우셔서 그 분을 보면 내 마음이 다 편안해진다.

 

또 우리 아파트에는 아주 연세가 많으신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얀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그 할머니는 오전 10시와 오후 4시, 하루에 두 차례씩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산책을 하시는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을 빼고는 시간도 딱딱 잘 맞추어서 산책을 하신다.

 

하루는 설거지를 하다가 딸아이를 불러서 시간을 물어 보았다. 집 안에 있는 줄 알았던 아이는 복도에서 “열 시요”하고 대답했다.

 

“아니, 너 언제 거기 나갔어? 거기서 시계가 보이니?”

“안 보여요. 옆 동의 할머니께서 지금 이 앞으로 지나가셨어요.”

 

그 정도로 할머니께서는 시간을 맞추어서 식사도 하시고 간식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에 두 번씩 드시고 산책도 하신다. 물론 주무시는 시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잘 지키신다.

 

할머니의 가족으로는 75세 된 아드님과 73세 된 며느님, 이렇게 세 식구가 사시는데 며느님은 할머니 시중을 드시느라 친구들과 백화점 쇼핑 한 번, 남편과 외식 한 번을 못 하신단다. 그래도 얼마나 할머니를 잘 모시는지 불평의 말씀 한 마디를 안 하신다고 주민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어느 한가한 날, 오전 미사를 마치고 내가 존경하는 그 형님과 같이 아파트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마침 집에 가 봐야 혼자 점심을 먹게 생겼기에 나는 그 형님께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다.

 

“형님, 우리 점심 먹고 들어갈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는 집에 가서 어머님 진지 드려야 되니까 자네가 우리 집에 가서 점심 같이 먹자.”

 

내가 대접하고 싶어서 제안을 했지만 어른이 집에 계신다니 ‘오늘은 형님 댁에서 점심 먹고 이야기나 나누며 놀다 와야지’ 생각하고 함께 형님 댁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형님 댁에 그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계시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형님, 저 분이 형님의 시어머님이셨어요?”

“그래.”

“그럼 95세 된 시어머님을 73세 된 며느님이 정성껏 모신다는 그 분이 바로 형님이세요?”

“정성껏은 무슨.”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하시는 그 형님의 얼굴은 진정 천사의 모습이 저렇거니 싶었다.

 

그러던 형님께서 얼마 전부터 얼굴이 까칠하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내심으로 ‘형님 연세도 있으시니까 할머니 모시기에 힘이 드시나보다’ 생각하고 하루는 김치전을 몇 장 부쳐서 가지고 갔다. 형님 댁에는 5~6세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한명 있었다.

 

“형님, 쟤는 누구예요?”

“응, 미국에서 손자가 왔다아이가.”

“예, 쟤네 엄마는 어디 외출했나 봐요?”

“미국 갔다.”

“그럼 애 맡기러 왔던 거예요? 할머니 모시기도 버거울 텐데 아이까지 형님이 어떻게 봐요?”

“그래, 지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하니까 자가 맨날 혼자 있어야 안 돼나, 지 애미가 아 좀 봐 달라고 데려다 놓고 갔다. 그러니까 내가 요새 죽을 지경이다. 자가 하도 치마꼬리를 잡고 다녀서 성당에도 못가고 아무데도 못 간다.”

“할머니하고 잠깐 놀고 있으라고 하고 성당에는 가셔야지요.”

“한국말을 잘할 줄 몰라서 할머니하고 얘기도 잘 안 된다.”

 

그러면서 웃지 못 할 얘기 한 가지를 들려주신다.

 

시간 맞추어서 할머니 시중드는 것만도 연세 73세인 형님에게는 힘든 일인데 아이마저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하루는 정말 울고 싶더란다. 그래서 아이에게.

 

“아가, 내가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할머니, 죽는 게 뭔데?”

“응, 죽으면 니 밥도 못해주고, 니하고 놀아 주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니가 상 할머니 밥도 해 드려야 되고, 니 혼자 미국도 가야되고.”

 

그러자 근심스러운 얼굴로 무언가를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그럼 나 미국 엄마한테 데려다 주고 죽어.”

 

기가 막힌다는 말은 이때 쓰나 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악역을 맡기로 했다.

 

“형님, 이때다 하고 미국에 전화해서 애 데려 가라고 하세요.”

“우째 그라노. 이것도 다 내 복아이가.”

“애가 가겠다고 자꾸 보챈다고 하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빙그레 웃기만 하던 형님은 지쳐서 핼쓱한 모습으로 오늘도 아이를 치마꼬리에 붙이고 저녁 장을 보러 가신다.

2008.04.05 18:55ⓒ 2008 OhmyNews
#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 #손주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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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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