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과 신규식은 국내에도 평양, 경성, 회령, 나남에 지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당명을 ‘신한혁명당’으로 정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 조달을 확고히 하는 한편, 각국의 원조를 얻기 위한 외교적 조처로서 중한의방조약체결을 계획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에 혁명전쟁 또는 독립전쟁이 발발하면 중국이 군자 및 병기를 공급한다는 밀약이었다. 그리고 국제적 효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일의 보증 하에 중국과 한국의 국가원수가 서명하고 혁명 정부 수립 후에 세계에 공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신한혁명당은 고종과의 비밀 면담을 위해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잠입시켰다.
소식을 전해들은 민제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제호 앞에는 백주원과 김태수가 앉아 있었다.
“국제 정세가 예측대로 될 리도 없고 설령 된다 하더라도 제국주의 독일의 도덕성으로 보아 약속이 지켜질 리도 없어요.”
김태수는 신한혁명당의 소식을 듣고 아주 그럴 듯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민제호의 말을 들으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난형난제로 부도덕한 놈들인데.”
듣고 있던 백주원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원세개 정권이 한국을 도울 힘이 어디 있겠어요?”
“백 동지 말이 맞습니다. 원세개는 도덕적으로도 믿을 게 없고요.”
민제호는 신한혁명당의 실패를 단정적으로 예견했다. 원세개가 일본과 전면전을 할 만큼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원세개는 틀림없이 일본에 굴복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민제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중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본에 굴복한 원세개는 병을 얻어 죽었으며,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 외교부장과 당원들은 고종을 만나기 직전 전원 체포되어 신한혁명당은 와해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래서 신규식이 서둘러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나머지 김태수와 백주원, 민필호를 비롯한 10명 정도의 밀정을 중국 각지와 국내 각처에 보냈던 것이었다.
아무튼 이상설의 꿈은 불행히도 좌절되었다. 상심이 워낙 컸던지 그는 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동지들의 주선으로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순수한 독립운동가의 좌절된 상처는 너무나 깊었나 보았다. 그는 회복되지 못하고 이국의 낯선 도시에서 48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러시아의 차가운 강 아무르에서 화장된 다음 재가 되어 흩뿌려졌다. 그의 유언은 유달리 침울하고 뼈아픈 것이었다.
“광복을 못 이루고 죽은 자가 무슨 낯으로 고혼인들 조국에 가겠소? 나는 실패한 인간이니 내 몸과 유품을 전부 불태우시오. 그 재도 모두 바다에 날려 버리시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말아 주시오.”
신규식은 신한혁명당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민제호를 불러 동제사 대원과 박달학원 학생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한 다음 보고서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위원회에는 민필호도 참여하게 되었다.
민제호는 백주원과 함께 상해로 와 일주일 정도 신규식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백주원과 민필호를 데리고 남경로(난징루)에 가서 신문과 잡지, 그리고 10여 권의 책을 구입했다. 그는 일주일 후 보고서를 완성해서 신규식에게 제출했다.
보고서는 신한혁명당 실패는 한국이 세계대전에서 미국 참전의 변수와 산동반도 이외의 세계정세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하지 못했던 데에 기인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은 원세개 정권의 매판성을 읽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규식은 민제호에게 물었다.
“미국이 한국이나 중국에 직접 영향을 미친 바는 없지 않소?”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신규식은 미국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향후 한국의 독립은 미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규식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소홀히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민제호는 신규식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소?”
“그 나라는 일단 약소국을 돕는 척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실제로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왜냐면 식민지 쟁탈에 늦게 뛰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 미국을 믿어야 합니다. 아마도 이용하기가 가장 어려운 나라가 미국일 겁니다.”
보고서는 신한혁명당이 비록 실패했지만 몇 가지 의미를 남겼다고 말했다. 먼저 상해를 중심으로 한 동제사로 하여금 세계적 안목을 갖게 한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신한혁명당이 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려는 노력을 보인 점, 정부 최고 조직 수준의 국제적 협약을 시도한 점, 그리고 외교 중심론의 상해 세력과 무장 중심론의 북경 세력이 연합했다는 점 등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끝을 맺었다.
“언제 민 동지가 미국에 대해 특강을 한 번 해주실 수 있겠소?”
“특강보다는 여럿이서 한 파트씩 나눠 연구한 후 주제 발표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학술적으로는 그게 더 좋겠지만 독립운동의 노선을 정하는 데에는 일관된 논리가 필요하니 이번만큼은 민 동지가 단독으로 연구해 발표해 보시지요.”
사실 1차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주의를 기울인 곳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발칸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국제 정세를 읽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착오가 시작된 것이었다.
1차세계대전의 국제 정서를 읽기 위해서는 최소한 1880년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이른바 ‘삼국협상’을 맺은 것은 세계 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영국과 프랑스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자 뒤늦게 식민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이태리를 부추겨 ‘삼국동맹’을 결성했다. 캘커타 - 카이로 - 케이프타운을 잇는 선에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영국의 3C정책과, 베를린 - 비잔티 -움 -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독일의 3B정책 사이에 빚어지기 시작한 암투는 날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공업과 무역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독일이 대함대 건설을 거의 달성해 가고 있는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주역을 맡고 있던 영국과 독일은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군사행동에 있어서만은 아주 신중했다. 그들은 군축 교섭을 계속 진행시켰고 분쟁의 소지가 있던 동·서양의 경계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한 중동 문제에도 타협에 도달했다.
이럴 경우 뇌관은 대체로 주연들이 아닌 조연들이 터트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이치인지도 몰랐다. 통감의 자격으로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의 정보부장에게 지령을 받은 한 사수의 저격으로 현장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것은 안중근의 이토 사살과 다소 비슷한 면이 있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 하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병합하는 절차를 밟아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포착한 오스트리아는 황제 특사를 보내 독일의 동의를 얻은 다음 세르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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