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허위 13도 창의군 군사장
박도
그때 담당 PD가 나에게 전한 바, 아카시 손자 아카시 모토츠구는 할아버지 덕분에 일본 사회에서 주류(귀족)로 산다고 했다. 1908년 5월, 왕산 의병장이 아카시 일본 헌병대장과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왕산: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한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당랑(螳螂 버마재비)이 수레를 막듯이,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아카시: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병자의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비록 한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다."지도층의 부패로 내홍을 겪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나는 이번 일본기행 내내 우리 정부 지도층의 도덕성을 생각하면서 매우 우울했다. 나라의 안보도, 경제도, 지도층의 도덕성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죽는 순간에도 부하를 생각하다이번 나의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를 도와주는 분이 많다. 조경환 의병장 손자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도 한 분이다. 의병 후손의 연락처를 찾아 알려주고, 또 후손들에게 취재 협조를 당부하여 주기에 나에게는 백만 원군과 같은 분이다. 조세현씨는 의병선양회 부회장직도 맡고 있기에, 나는 의병선양회 주관 의병 답사에 두 차례 동행하여 많은 대화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들은 할아버지 조경환 의병장 일화의 감동은 매우 컸다.
1909년 음력 섣달, 대천 조경환 의병장은 광주 어등산 사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교전 중, 적탄 두 발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그런 가운데도 조 의병장은 품안에 간직한 의병진 명단을 일제 헌병대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조 의병장은 의병진 명단을 찢다가 생각하니 그 조각을 모으면 왜적들이 이를 알 것 같아서 입으로 씹어 삼키려다가 분량이 많아 부싯돌로 태우려 하였다. 하지만 안간힘을 다해도 불이 붙질 않아서 양화(성냥불)를 구해 명단을 불사른 뒤에야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 의병장 순국 후 부하들과 동지들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는 후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전의 할머님 말씀을 전한 바, 당신은 남편이 몰래 찾아올 때를 거의 정확하게 육감으로 알았다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미리 토지문서와 옷 한 벌을 머리맡에 장만해 뒀다고 한다. 그런 날 한밤중에 할아버지가 몰래 담을 넘어 안방으로 와서 잠시 머물며 한바탕 방사를 치른 뒤 옷을 갈아입고 토지 문서를 들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하였다고 했다. 그런 탓인지 당신은 의병으로서는 꽤 많은 4남매(3남1녀)의 자녀를 두셨나 보다.
끝까지 동지와 부하를 지키는 그 의리가 100년을 지난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의병활동 가운데도 집에 두고 온 아내를 찾아온 당신의 뜨거운 정열이 가상하기도, 눈물겹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