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녕의 뒷모습. 서울시 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뒷모습이다. <대왕세종>에서는 충녕의 뒷모습(부정적 이미지)를 많이 보여주었다.
김종성
그런데 지난 4월 6일에 방영된 제28부를 계기로 충녕의 이미지가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충녕의 이미지가 명확해진 게 아니라, 충녕의 이미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명확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드라마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는 충녕의 실체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하의 글에서는 그 같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기로 한다.
드라마 대본이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방영된 내용을 기준으로 할 때에 <대왕세종> 작가의 의도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대왕세종> 작가는 충녕의 부정적 측면(정치적 야심, 주제넘음 등등)을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제28부에서 제시했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충녕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최초의 조선 군주'라는 점이다.
자기 손에 피 묻히지 않은 최초의 조선 군주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대왕세종> 제27부(4월 5일자) 말미에서는 고려황실 잔존세력 처형장과 '망나니 충녕'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날 충녕의 이미지는 왕자나 학자가 아니라 분명히 '검객'이었다.
'충녕이 부왕의 명령대로 정말로 반군 책사 전판석의 목을 벨 수 있을까?' 그런 시청자들의 의문을 대신하듯이 드라마 속 등장 인물들이 한마디씩 했다. "목을 벨 것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별 수 없는 칼잡이의 아들이지."
그렇게 27부가 막을 내리고 28부의 막이 올랐다. 시청자들의 주목을 한껏 집중시킨 상황. 칼을 높이 쳐든 충녕.
칼은 결국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우리에겐 이 자를 처형할 자격이 없습니다!" 칼과 피로 일어선 조선왕조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고려황실 잔존세력을 처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는 왕자를 포기하겠습니다!" 꼭 80년대 운동권 대학생 같은 충녕 왕자님이었다.
그러고 나서 충녕은 북삼도(평안도·함경도·황해도)로 유배를 떠났다.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대권에 좀 더 접근하기보다는 대권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결코 백성의 피를 묻히지는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동안 충녕에게 냉소적이었던 경녕군이 한마디 했다. 그대에 대한 오해를 거두었다고 말이다.
이 장면은 충녕대군에 대한 <대왕세종> 작가의 평가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비록 형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욕심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었지만, 충녕은 백성을 끔찍이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결코 태조·정종·태종처럼 손에 피를 묻히고 권좌에 오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태평성대를 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평가 말이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최초의 군주 세종대왕. 그래서 그는 정통성 있는 군주라고 하는 <대왕세종>의 관점이 드러난 또 다른 대목은 세자에 대한 황희의 충언이었다. 제28부에서 황희는 세자에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최초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 말은 형식적으로는 세자에 대한 말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충녕에 대한 말이었다. '정통성 있는 군주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군주'라는 작가의 관점을 담은 이 말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등극한 최초의 군주는 충녕이었으므로 결국에는 충녕에 대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