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하.심양 교외지역으로 지평선이 맞닿아있다.
이정근
신계영이 심양을 출발했다. 포로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국경까지 600여 리.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지만 한달음에 달려갈 기세였다. 끌려올 때는 암울한 길이었으나 돌아가는 길은 희망의 길이었다. 혼하를 건너 백탑보를 지나고 십리하를 지났다. 지평선이 맞닿은 들판에서 일손을 놓고 넋이 나간 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 포로들이었다.
귀국하는 행렬을 바라보는 포로들은 부러움을 넘어 절망을 느꼈다. 조정의 협상결과를 지켜보았으나 자신은 빠졌다. 언제 다시 협상이 재개된다는 기약도 없다. 조국이 그리웠다. 고국에 있는 부모형제 가족이 보고 싶었다. 짐승처럼 일하다 오랑캐의 땅에 뼈를 묻는다고 생각하니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돌파구는 탈출이었다. 심양과 요동에서 탈출사태가 발생했다. 도망가다 잡히면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거나 귀, 코 등 신체를 절단당해야 한다. 민가를 피해 산속을 헤매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목숨 걸고 탈출한 것이다.
포로가 도망갔다고 항의하는 청나라 사람들이 세자관에 몰려들었다. 포로를 찾아내라는 것이다. 도망간 포로를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세자관으로서도 대책이 없었다. 오히려 잡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자관 방문이 별무소득이 없자 청나라 사람들은 관가에 찾아가 하소연했다. 재산을 잃어버렸으니 나라에서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세자관으로 되돌아 왔다. 도망 포로의 쇄환문제는 훗날 조선과 세자를 압박하는 구실이 되었다.
탈주자를 데리고 가야 하나? 버려야 하나? 그것이 문제였다포로 행렬이 요동을 지나 청석령에 이르렀을 때 백여 명의 탈주자가 따라붙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목숨 걸고 탈출한 동포를 버릴 수도 없고 데리고 가자니 짐이 되었다. 청석령 마루턱에서 긴급 구수회의가 열렸다.
"탈주자들을 데리고 가면 속환자들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을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야 없지를 않소."
"탈주자들은 범죄자입니다."
"목숨 걸고 도망 나온 동포들을 어찌 버린단 말이오?"
"식량사정도 좋지 않습니다."
"거야 십시일반으로 나누어 먹으면 되지를 않겠습니까."
"탈주자들도 속환자들과 함께 차별 없이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소신이 지겠소. 청나라 사람들이 감옥에 가라면 갈 것이고 포로로 남아라면 소신이 남을 것이오."
신계영이 총대를 멨다. 협상대표가 책임을 지겠다는데 누가 딴지를 걸겠는가. 봉항산을 통과한 행렬이 책문에 이르렀다. 국경검문소다. 속가를 지불한 포로들은 꼬투리나 잡히지 않을까 긴장했고 탈주자들은 발각될까 두려웠다.
호떡집에 불난 게 아니라 장꽤집에 불났다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책문은 아수라에 북새통이었다. 청나라 관원과 군사들이 어쩔 줄을 몰랐다. 혼이 빠진 것이다. 그럴수록 포로들은 웅성웅성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호떡집에 불이라도 났나? 왜 이렇게 시끄러워?"
"호떡집에 불난 게 아니라 장꽤집에 불난 거야 크크크."
"히히히."
"조용히 하라고 했지 않나. 이렇게 떠들면 안 보내준다 해."
"네 마음대로 해라 해."
"뭐라고? 이것들이…."
"그래, 어쩔 테야? 하고 싶은 데로 하라구. 우리는 네놈들에게 천금 같은 돈 바치고 나온 사람들이야. 세상에 사람 잡아다 팔아먹는 놈들이 어디 있냐? 이 천하에 날강도 같은 놈들 같으니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