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와 홍국영. 드라마 <이산>.
MBC
좌상 장태우(가상의 인물)가 정국의 한 축을 장악한 이후 조선 정계에는 그를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정치적 연대가 등장했다. 홍국영과 정순왕후(당시에는 왕대비)의 연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연대가 위력을 발휘함에 따라 <이산> 제63회(4월 22일)에서는 장태우가 숙위소 군인들에게 체포·연행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현재 드라마 <이산>에서 홍국영-정순왕후 연대는 국왕 암살미수 사건과 완풍군 문제 등을 중심으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정순왕후는 이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특히 완풍군 문제에서 홍국영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 한 예로, <이산> 제63회에서는 정순왕후가 최측근인 최석주(가상의 인물)를 내세워 은언군(정조의 배다른 형제)의 아들 이담(완풍군 혹은 상계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는 장면을 내보냈다. '이산 너는 이제 아들 낳을 생각을 말라'는 메시지와 다를 바 없는 이 건의는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의 홍-정 연대는 그 정도로 막강하다.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은 홍-정 연대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이러한 홍-정 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순왕후는 홍국영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국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가중되던 정조 3년(1779) 봄에도 정순왕후는 기본적으로 홍국영의 적들과 같은 편에 서 있었다.
정순왕후가 홍국영 편에 서지 않았다는 점은 정조의 후사문제에 관한 정순왕후의 기본 입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산>에 따르면, 정순왕후는 입양을 통해 정조의 후사를 세우고자 하는 홍국영의 방안을 지지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정순왕후는 입양이 아닌 후궁 간택을 통해 후사를 이어가는 방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 점은 홍국영의 세도가 유지되던 시기에 정순왕후가 내린 두 차례의 후궁 간택 하교에서 잘 표현된다. 첫 번째는 완풍군 문제가 발생하기 1년 전인 정조 2년(1778)이고, 두 번째는 홍국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강화되던 정조 3년(1779)이었다.
두 차례의 하교에서 나타나는 정순왕후의 일관된 입장은, 정조의 후사는 후궁 간택을 통해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2월 21일자 기사에 수록된 정순왕후의 하교에 담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음미해보면, 그가 홍국영의 방안(입양을 통한 후사문제 해결)에 기본적으로 찬동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후궁간택 통한 왕위계승 지지한 정순왕후
"사백년 종사가 오로지 주상에게 의지하고 있다. 춘추가 한창인데도 아직 후사의 경사가 없다."(四百年宗社之托惟在主上春秋鼎盛而尙未有嗣續之慶)여기서 "춘추가 한창인데도"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국영은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정조 임금에게 원빈의 양자를 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향후 정조 임금한테서는 후사가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된다는 그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주상은 아직 한창 나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향후 정조의 몸에서 후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표출하는 것이다.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정순왕후가 완풍군 이담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다면, 그가 이 같은 하교를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실제의 정순왕후는 입양이 아닌 후궁간택을 통한 왕위계승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홍국영과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 <이산>에서처럼 완풍군 문제를 놓고 그가 홍국영과 정치적 연대를 결성할 가능성은 낮았던 것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홍-정 연대라는 가상의 설정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태우라는 가상의 거물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장태우를 전제로 한 연대이므로, 이 연대 역시 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산>이 홍-정 연대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드라마 속의 정순왕후가 세손 시절의 이산에게 악독한 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등극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정순왕후가 '뒷방 노인네'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홍국영이라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드라마 <이산>의 설정이다.
드라마 초기, 지나친 악녀로 묘사된 데 따른 결과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