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의사 명단
박도
28 의사 명단의장(義將) 박만화 최덕일 여주목
의사(義士) 한사국 이광삼 김사범 허윤조의졸(義卒) 윤정오 김치삼 김여집 서성일 정군삼 한득주 박인완 박달천 김춘화 박운서 최일권 양경삼 성경삼 서상열 오병선 의동(義童) 김학도 김동관 박철규 허천석의승(義僧) 봉수 덕홍이석용 의병장 행적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출신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8월 강제로 군대해산을 당하는 등 날로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 심해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 낼 것을 결심하였다.
임실 장수 곡성 진안 남원 함양 순창 등지에서 동지를 모아 1907년 8월 26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이석용 의병부대 진용은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 이석용 총지휘 박갑쇠· 곽자의· 임종문선봉 박만화· 최덕일· 송판구 연락 홍윤무·박성무· 윤병준중군 여운서· 김운서· 김성학 도로부장 김사원· 김공실· 김성율후군 김사범· 윤명선· 김성학 보급 한규정· 박금동· 박문국참모 전해산· 한사국· 이광삼 운량 오기열· 조영국· 김학문1907년 9월 영광 수록산에서 기삼연이 호남창의진을 편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자, 자신은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수용(全垂鏞, 海山) 등과 같이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의진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일병 1인을 살해하거나 생포하면 일백 냥을 줄 것을 약속하는 현상을 걸어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간청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 투고하여 의병을 일으킨 취지를 밝히고 백성들의 협조를 요청하고 진군을 개시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밤 진안의 일본 병참(兵站)을 습격하여 전투장비 수천 건을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용담(龍潭)의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합세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왜병과 접전하여 적 수십 명을 격살시켰다.
1908년 1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순창에서 적에게 체포당하여 광주의 서천 백사장에서 순국하자 의진은 다시 분진(分陣)하게 되었다. 이에 이석용은 다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남원으로 진출하여 적의 장교 3명과 졸병 다수를 격살하였다.
이어서 '왜죄 10조(倭罪十條)'를 크게 써서 거리마다 붙여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기왕의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것과 다시 매국노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간청하였다. 그 뒤 남원· 전주 등지를 중심으로 왜적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적에게 크게 패한 뒤 의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한인 형사 김아무개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이른바 살인· 방화· 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다.
다음은 재판장과 이석용 의병장간의 1문 1답의 대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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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한문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답) 사서오경과 제가백가서도 모두 읽었다.(문) 재산이 있는가?(답) 가난한 선비가 무슨 재산이 있겠는가.(문) 무슨 목적으로 폭도가 되었는가?(답) 너희 일인을 배척하기 위해서이다.(문) 통솔한 부하가 삼백 명이라고 하는데 정말인가?(답) 그렇다.(문) 조선이 일본과 합병 이래 천황폐하의 은덕이 망극하여 일반 신민이 환희하니 너도 충실한 신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답) (크게 웃으며)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너희 나라 신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문) 의병이라고 자칭하면서 인명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공금을 강탈했으니 이 무슨 불법 행동이냐?(답) 대한(大韓)을 배반하고, 부일(附日 일본에 아부함)하는 자는 죽일 것이요. 공금(公金)은 대한의 국세(國稅) 인즉 국왕이 잃어버린 돈을 신하가 찾아 쓰고, 아비가 잃어버린 돈을 자식이 찾아 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무슨 불법이란 말인가?(문) 그러면 왜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다녔는가?(답) 시세가 불리함으로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문) 스스로 의사(義士)요, 충신(忠臣)이라 하면서 일이 되지 않을 줄 알면 죽을 뿐인데, 왜 구구히 살아서 이런 욕을 보는가?(답) 네 놈들이 어찌 내가 죽지 않는 까닭을 알겠느냐? 옛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여섯 차례나 기산으로 나아가 싸웠고, 강유(姜維)가 아홉 차례 중원을 친 것도 모두 성공 못할 줄 알면서도 강행한 것이다. 비록 성공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한 국사(國士)로 후일 광복을 꾀하지 않고, 어찌 스스로 죽을 수 있겠느냐?(문) ‘창의록(倡義錄)’을 장황하게 저술한 것은 무슨 소용이 있어 그랬으며, ‘불망록(不忘錄)’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게 수다하게 적었는가?(답) 창의록은 충분(忠憤 충의로 생긴 분한 마음)을 못 이겨 그렇게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너희 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것이요, 불망록은 내가 거사한 지 오륙년에 친구들에게 많은 보조를 받았으므로 후일 갚고자 기록했던 것이다.(문) 사실 심문은 끝났으니 최후로 자기에게 이익이 될 말이 있으면 진술하라.(답) 내가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빨리 죽여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무슨 자신을 유리하게 할 말이 있겠느냐? 다만 한이 되는 바는 이등박문이 안중근(安重根)의 손에 죽었는데 나는 사내(寺內正毅 데라우치)를 못 죽인 것과 우리나라의 오적(五賊)과 칠적(七賊)을 못 죽이고 또 동경(東京)과 대판(大阪)에 불을 지르지 못한 것뿐이다.(재판장) 선고를 내릴 터이니 기립하라.(이석용) 기립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다.이때 강제로 일으켜 세우니 이석용은 크게 노하며 "나의 마음은 불기(不起 일어나지 않음)다"고 하자 재판장은 그대로 사형을 선고하고 나갔다.
이석용은 이에 불복 공소(公訴) 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어 1914년 4월 4일 37세의 혈혈 청년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