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 문무인상김유신장군 과 무열왕 혹은 경순왕과 김충이라 전해진다.
김환대
내부에는 홰나무로 깎아 다듬은 2구의 조각상이 있다. 왼쪽에는 무인상이 오른쪽에는 문인상이 자리하고 있다. 머리부분이 전체 크기의 반을 차지하며, 왼손만 보이고 오른손은 옷 안에 가려져 있다. 문인상은 커다란 관모를 쓴 관리가 한 손으로 턱수염을 잡은 채 인자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원스럽다.
무인상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 투구를 쓰고 투구 위로 삼지창을 꽂고 있다. 왼손에 물건을 지닌 형태로 보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무인상 역시 호탕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남자다움이 한껏 드러난다.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지정 문화재이나 문화재에 대한 안내문은 그 어디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목조상경순왕과 김유신 장군이라고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김유신 무열왕 혹은 김부(경순왕)과 김충으로도 추정한다. 경순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고려의 도읍지 송도로 이거한 후 신라의 유민들이 경순왕의 납국합병을 반대하고 신라의 독립을 도모하고자 경주에서 가까운 북형산성에 농성하여 고려와 일전을 불사하며 수천 명이 운집하였다. 왕건으로선 삼한을 통합한 여세로 공격하면 북형산성의 신라군쯤이야 추풍낙엽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농성군을 무마하여 회유함으로써 자진 해산하게 하였다.
세월이 흘러 경순왕이 송도에서 서거한 후 신라의 유민들은 그를 추모하여 북형산 성터에 사당을 건립하고 그의 아들 김충 태자와 함께 모시고 형산성황사(兄山城隍祀)라 하였다.
당초에는 경순왕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춘추향제를 올려 그 넋을 위로하였는데, 고려 말부터 기복신앙처로 전락하였다. 본래 사당은 토막식 건물로 조선말엽까지 있었으나 연일의 모 문중에서 그 터에 분묘를 설치하면서 철거하자 성터 바로 밑에 있는 왕룡사에서 약 100년 전에 경내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한다.
왕룡사의 김부대왕 부자 목상은 원래 경순왕이 죽은 뒤 신라의 유민들이 북형산성 터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형산 성황사란 사당에 봉안한 것이다. 그러다 조선말 어지러운 상황을 틈타 어느 문중에서 이를 철거하고 분묘를 설치하자 성터 밑에 위치한 왕룡사에서 경내로 옮겨 지금에 이른 것이라 한다. 사당은 고려 말에 이미 기복 신앙처로 전락해 있었다. 무속신앙으로 변질돼 있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