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김기덕 감독의 이 영화가 그리는 것은 '인과응보'다.
LJ필름
처음 주산지를 찾은 건 십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이 외진 호수는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늦여름이었는데 호수에 물이 잔뜩 불어 있었고 물빛이 몹시 어두웠다. 물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왕버들 노목과 수면에 드리운 적막이 낯설었고 뭐랄까, 섬뜩하다고 해야 하나, 잠깐 무섬증을 느끼기도 했다.
주산지는 길이 100m, 넓이 50m, 수심 8m 정도의 아담한 호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못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호수 속에 자생하는 약 150년생 능수버들과 왕버들 30수는 이 외진 연못의 상징이 되었다.
왕버들은 원래 호숫가나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높이 약 20m, 지름 1m의 버드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밑동의 반을 물에 담그고 있는 주산지의 왕버들은 그것 자체로 일찍이 보기 드문 비경을 연출한다. 특히 새벽녘에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의 왕버들은 숱한 사진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주산지는 밝아지고 친근한 호수가 되었다. 영화 덕분에 이 호수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들로 호수 주변은 늘 시끌벅적하다. 입구에 큼직한 주차장이 들어섰고, 호숫가엔 전망대까지 만들어졌다.
한때는 호수까지 차를 타고 올랐지만 지금은 주차장에 차를 버리고 한 10여 분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덕분에 주변은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고, 간이 화장실 외에 어떤 시설도 들어서지 않아서 그 호젓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주차장은 이미 각지에서 온 차량으로 혼잡하다. 완만한 언덕길을 10여 분 올라 산속의 호수 ‘주산지’를 만난다. 호수 주변의 연둣빛으로 타고 있는 신록의 물결을 담고 호수는 그윽하고 조신한 얼굴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방 왼편의 바윗돌 위에 '이공제언성공송덕비(李公堤堰成功頌德碑)'라 새긴 돌비 하나가 서 있다. '이공이 제방을 쌓아 이룬 공덕을 기리는 비'다. 비문에는 "정성으로 둑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오래 기리고자 한 조각돌을 세운다"고 새겨져 있는데, 정작 이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