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지역 고등학생들.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고교생 시민군'의 첫 일은 돌멩이 쪼개서 나눠주기1980년 5월 21일. 휴일 같은 기분에다 어제 시위에 참가해 피곤해서인지 오랜만에 오전 10시경까지 늦잠을 잤다.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옆방의 1학년 후배 김순구가 야단법석이다. 조금 전에 농성동 로터리에 갔다가 목격한 시위 장면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순구의 현장 설명은 계속됐다. 성난 시민들이 전날 광주시내 일원에서 자행됐던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군인들을 뒤쫓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대의 시위대 차들이 시민들이 모여 있는 농성동 로터리를 거쳐 시내 쪽으로 지나갔다고도 했다.
하숙생들과 농성동 로터리에 갔다. 로터리 광장에 도착하기도 전인데 최루탄 냄새가 곧바로 눈물샘을 자극했다. 눈이 따갑더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채기와 함께 콧물도 흘러내렸다. 함께 시위를 구경하던 아저씨가 손으로 눈을 비벼대면 더 따갑다고 말해 눈을 만질 수도 없었다.
벌써 시민들과 계엄군들 간에 한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터리 광장 한복판에 이르자, 송정리 방향 넓은 도로에서 수백여 명의 시민들이 계엄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계엄군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공격하면 시민들은 최루탄을 피하여 후퇴하곤 했다.
시위를 지켜보던 나도 하숙생들과 시위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시위대 후방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공급하는 일을 했다. 하숙생들과 함께 시위대 뒤쪽에서 시민들의 유일한 무기인 돌멩이와 벽돌 조각을 던지기에 알맞도록 쪼갠 뒤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시민들과 계엄군간 치열한 공방이 계속됨에 따라, 후방에서 한가롭게 무기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나도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일선으로 자원했다. 계엄군들과 지근거리에 위치한 최전방으로 이동하여 돌멩이와 벽돌 조각을 던졌다.
저만치에서 떨어져 시위 장면을 구경하던 동네 아주머니들도 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아주머니들은 '전장터' 인근에 있는 주택을 오가면서 세숫대야와 양동이에 수돗물을 떠다 놓고 시민들의 따가운 눈을 씻게 했다.
시민들은 계엄군들이 쏜 최루탄이 터지면서 퍼져 나온 최루가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 아주머니들이 떠다놓은 수돗물로 얼굴을 씻고 다시 '전의'(戰意)를 가다듬곤 했다. 광주-송정리간 도로 아스팔트 바닥에는 밀가루처럼 하얀 최루가스 분말이 여기저기에 한 움큼씩 쌓여 있었다.
시민들과 계엄군의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돼, 양측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할수록 길바닥에 깔려 있는 최루가스 분말도 덩달아 흩날리면서 춤을 췄다. 이 바람에 시민들의 눈과 코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과 최일선에서 싸우던 최전방의 시민들이 전술상 후퇴하면 후방에 있던 시민들이 맨 앞으로 돌진, 계엄군들과 싸웠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시민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민들 가운데 최루탄 피해자가 속출했다.
어떤 시민은 계엄군이 쏜 최루탄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몸에 맞아 다쳤다. 어떤 시민은 도망치다가 하필이면 최루가스 분말이 쌓여있는 곳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은 물론이고 온 몸에 최루가스 분말로 뒤범벅이 되어 눈물 콧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계엄군과 시민들의 공방전이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계엄군들도 농성동 로터리 광장에서 멀리 보이는 화정동 4거리 고갯마루까지 후퇴했다.
시민들은 곧바로 광-송간 도로변 목재소로 이동했다. 당시 농성동 로터리 광장에서 송정리로 가는 길인 광-송간 대로변에는 광주의 변두리였던 관계로 목재소들이 많았다. 광-송간 도로는 지금처럼 굵은 노란 실선 두 줄이 그어진 중앙분리대가 아니라, 화단으로 된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화단에는 잘 다듬어진 키 작은 향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시민들은 목재소에서 지름이 한 아름이나 되고, 길이 5m가 넘는 통나무를 운반해서 광-송간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시민들은 적게는 5명, 많게는 10여명이 달라붙어 통나무를 도로로 옮겼다. 물에 젖은 통나무는 동아줄을 묶어 연결한 뒤 어렵사리 도로로 끌고 나왔다.
광-송간 도로는 순식간에 통나무 바리케이드로 성벽을 이루었다. 몇 겹으로 쳐진 통나무 바리케이드는 탱크도 뚫지 못할 것 같았다. 시민들이 통나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이유는 비무장 상태인 시민들과 달리 완전 무장한 계엄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통나무 바리케이드는 계엄군이 군부대(상무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을 붙잡아 응징하고, 계엄군의 재진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옛 상무대는 장성으로 이전했고, 현재 군부대 터는 택지로 개발돼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광주광역시청 등 관공서가 들어서 있는 등 광주광역시의 중심 지역으로 변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