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적성비.윗부분은 지금은 소실되었다. 오랜 세월 흙에 파묻혀 있어서 글자는 잘 남아있다.(국보 제198호)
송영대
단양신라적성비는 국보 제 198호에 해당되는 귀하신 몸이다. 하지만 이 비석은 그러한 귀하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30년 전에만 하더라도 단순한 돌덩어리 취급을 받아야했다.
이 단양신라적성비가 발견된 것은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서이다.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단양적성을 오르다가 등산객들이 자신의 등산화를 털고 닦는 바위를 보게 된다. 다듬어진 흔적이 잘 보이던 이 비석을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흙에 파묻힌 쪽을 확인해보니 글자가 쓰여 있다는 점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단양신라적성비가 발견된 건 늦은 시간, 결국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조사단은 재빨리 근처의 나무덤불과 이파리 등으로 단양신라적성비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올라가서 이를 확인하게 되고,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단양신라적성비는 이렇게 1400여 년 동안 잊혔던 존재였다. 정확히는 신라의 통일 이후부터라고 해야겠다. 신라시대,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구려와 신라의 날선 대립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이곳은 안전한 신라의 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무리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라고 할지라도, 이 칼을 쓰고, 또 갈지 않는다면 녹이 슬기 마련이다. 평화로운 시대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단양적성은 결국 잊혀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조선시대에 이 성은 단순히 고성(古城)이라고 불리게 되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단양신라적성비는 그러한 단순한 고성에 불과했던 단양적성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단양신라적성비의 내용을 보면,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의 척경, 즉 국경 개척에 큰 공을 세우고 충성을 다했던 적성사람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겐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고 하는 국가 정책의 포고내용이 담겨있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서 활발한 영토 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신라의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던 이때, 신라는 토착민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야이차는 진흥왕의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하였고, 이를 글로써 놓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 보면 주목 할 만한 사람들이 야이차 외에 더 있다. 바로 이사부와 김무력이다. 이사부는 울릉도를 신라에 복속시키고 대가야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한 진흥왕대의 명장이다. 그리고 김무력은 가야 출신의 장군으로서 백제 성왕과의 싸움인 관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그리고 신라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되기에 그의 존재가 이곳에 보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온달산성의 쌍둥이 산성, 단양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