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캔버스로 전쟁과 폭력에 맞서다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6] 고야 '1808년 5월 3일'

등록 2008.05.29 13:22수정 2008.05.2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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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명 :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주제에 의한 변주곡

지금부터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주제에 의한 변주곡 연주를 시작하겠다. 이 변주곡의 테마인 '1808년 5월 3일'은 제목 그대로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한 후, 스페인 궁전 앞에서 점령에 반대하는 민중들을 처형한 1808년 5월 3일의 잔인한 현장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잔인함을 고발한 그림을 대표하는 '전범(典範)'이 되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이 동물에게, 그리고 나아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가하는 '부당한 폭력의 증거'로서 이만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시인 보들레르도 '진실속에 숨겨진 잔인함'을 표출한 작가로서 고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는 이 작품이 다른 화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고야의 그림이 시대를 바꿔가며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살펴보자.

# 테마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총살>, 1814~1815, 프라도미술관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총살>, 1814~1815, 프라도미술관고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등불 앞에서부터 시내의 성문까지 장사진을 치고 있는 양민들이 줄을 지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양민들 앞에는 얼굴도 볼 수 없고 이름도 없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무장군인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무장하지 않은 수많은 양민들을 칼을 꽂은 총으로 사살하고 있는데, 굉장히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보인다.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양민들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주저앉을 듯, 혹은 반항의 몸짓으로 이 상황을 맞고 있어, 더욱 비극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림 왼쪽에는 벌써 처형당한 시체들의 피가 대지를 물들이고 있다.

그런데 가운데 흰옷의 지도자 같은 남자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는 두 손을 높이 쳐든 채 주먹을 쥐고 최후의 순간까지 반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희생자나 처형자들에 비해 그의 체구가 약간 부풀려진 것도 그렇다. 이는 그를 신성하고 희생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두 손바닥에는 자세히 보면 성흔(聖痕)이 찍혀있다. 이것은 그의 몸짓과 더불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결부시킨다.

프랑스군이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한 이 민간인 학살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졌다. 음침한 검은색과 회색과 갈색을 배경으로 뜨겁게 가열된 것처럼 빛을 내는 흰색과 황금색과 진홍색은 불운한 사내들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고야는 이처럼 '불멸의 사내들'과 명령에만 복종할 뿐, 인간성을 상실한 '살인기계'같은 부대원을 대조시킴으로써 전쟁의 참상과 야만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반도전쟁(1808~1814년)'이다. '반도전쟁'은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대륙 지배에 대항해 스페인 민중들이 독립을 위해 봉기하면서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반도전쟁'을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반도전쟁' 또는 '독립전쟁'은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한, 또 그것을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공화주의 수호'를 내세우며 시작했던 이 '나폴레옹 전쟁'은 그러나 나폴레옹이 절대권력을 장악하면서 전쟁의 목적 자체가 바뀌게 된다. 단순히 프랑스 자국의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전쟁'으로 바뀌게 된 것. 이는 스페인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1808년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키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앉힌 것. 그러자 5월 2일 마침내 마드리드 시민들이 침략자에 맞서 봉기했다. 이 봉기는 고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고야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처음으로 캔버스에 표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항상 인간 삶의 사악한 면모를 감지하고 있었고, 마침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으로 인해 그 '사악한 인간 삶'을 실체화시킨 셈이다. 명분이 어떻든 죽음과 기아를 필연적으로 양산할 수밖에 없는 전쟁,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인간을 학살하는 인간. 이 모든 것이 고야에겐 '사악' 그 자체였다. 전쟁으로 인해, 이 세계에서 이미 고착화된 파괴적이고 잔인한 지옥을 고야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었다. 즉 고야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성보다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을 그림에서 특별히 강조했다.

#제1변주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 만하임 쿤스트할레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 만하임 쿤스트할레마네

반세기 뒤, 에두아르 마네는 멕시코에서 일어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묘사하면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예술적 출발점으로 이용했다.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서 멕시코를 점령하고자 했던 '나폴레옹 3세'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비판했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멕시코의 역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1854년, 사포테카 인디오 출신인 베니토 후아레스와 자유당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던 산타아나의 장기독재를 '혁명'으로 무너뜨린다. 이어 대통령이 된 후아레스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휴경지를 몰수했으며 귀족계급만을 위한 특별재판소를 폐지했다.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은 개혁입법이었다. 이로 인해 보수기득권 세력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간청했고, 나폴레옹 3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멕시코 상황에 개입, 1864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 막시밀리안을 '꼭두각시'로 멕시코 황제로 앉혔다.

후아레스와 멕시코 민중은 이 보수기득권세력과 나폴레옹 3세의 제국주의에 맞써 3년을 싸웠다. 결국 나폴레옹 3세의 군대는 퇴각했고, 1867년 7월 후아레스는 멕시코시티에 입성, 공화국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막시밀리안은? 자신을 황제로 앉혔던 나폴레옹 3세의 군대가 떠나버리자 당연히 완전한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자신을 보좌하던 두 장성인 미구엘 미라본과 토마스 헤이아와 함께 멕시코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마네는 이 소식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막시밀리안을 죽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멕시코 민중들이지만, 사실상 나폴레옹 3세라고 생각했다. 멕시코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나폴레옹 3세의 야심이 아니었더라면, 오스트리아에 있던 막시밀리안이 멀리 멕시코까지 가서 죽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마네의 생각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마네는 스페인 여행 때 보았던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제작했다. 마네는 같은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초기작을 보면 사형집행수들의 모습은 마치 멕시코 목동 같다. 챙이 넓은 민속모자를 쓰고 있는 사형집행수들을 보라.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초기작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초기작마네

이는 '사실주의적 그림'은 될 수 있어도, 마네의 의도를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마네는 최종작에서는 사형집행수들의 모습을 프랑스군으로 바꿔버렸다. 멕시코 민속모자 대신에 프랑스 군모(軍帽)인 케피(kepi)를 집행수들의 머리 위에 씌우고, 옷도 정규군의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막시밀리안 황제를 멕시코인들이 처형한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 3세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개'를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제2변주

 마네 <파리 코뮌의 바리케이드>, 1871,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마네 <파리 코뮌의 바리케이드>, 1871,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마네


마네가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그린 뒤 불과 몇 년 후에 프랑스에서는 또다른 참사가 벌어졌는데, '파리코뮌(1871)'이 그것이었다.

파리코뮌은 1870~1871년에 걸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 3세의 무능함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휴전조약이 체결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하자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이윽고 국민방위군은 3월 1일 파리의 행정권을 장악하며 '파리 코뮌'을 수립하고 이후 5월 20일까지 파리를 자치적으로 통치한다. 훗날 소비에트 연방의 창시자 레닌은 파리 코뮌을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파리코뮌은 10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코뮌은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명은 눈에 띄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발포했다. 사망자의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적게는 1만명, 많게는 5만명까지…. 진압 후 파리코뮌의 연루자 10만여명이 체포되어 그 중 4만여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일부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되기도 했다.

공화주의자였던 마네가 이를 그냥 지나쳤을리 없다. 마네의 이 작품은 파리코뮌의 붕괴에 대한 기록이다. 1871년 5월 21~23일 '피의 일주일' 때 정부군에 의해서 민중들이 총살되는 모습을 수채화로 그려낸 것이다. 이 '살육의 향연'을 마네는 미술로써 생생이 증언하고 있다. 마네는 이같은 처형자의 야수성과 무자비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시 이 작품에서도 고야의 '1808년 5월 3일'구도를 따왔다.

#제3변주

 피카소 <한국전쟁 대학살>, 1951, 파리 피카소미술관
피카소 <한국전쟁 대학살>, 1951, 파리 피카소미술관피카소

고야의 '희생자와 처형자의 대결구도'는 20세기 최고의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사용됐다.

총부리 앞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임산부와 아이들이 서있다. 여인들은 공포에 질리다 못해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아이들은 놀라 도망가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학살자는 역시 고야의 그림에서처럼 살인을 저지르는 '자동인형' 같은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피카소는, 대표적 반전(反戰)그림 <게르니카>를 그리는 등 '전쟁 반대론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갔다.

한국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1950년에는 제3차 공산주의자 평화대회에 참석해 "나는 죽음에 맞선 생명의 편입니다. 나는 전쟁에 맞선 평화의 편입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6. 25전쟁이 발발한 지 7 개월여 지난 뒤인 1951년 1월, 그는 이 그림 '한국 전쟁 대학살(Massacre en Coree)'을 그렸다. 아무래도 그림 속 양민 학살자는 '미군'인 듯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52일간 신천을 점령하던 중 신천군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3만5천383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변주되어서는 안될 그림을 위하여

 더이상 변주되어서는 안될 그림
더이상 변주되어서는 안될 그림

피카소는 <한국전쟁 대학살>을 그리면서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 그림도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고야, 마네, 피카소가 붓과 팔레트를 무기삼아, 전쟁을 일으키는 자에 대항해 그 폭력성을 가감없이 드러냈던 것이리라. 그런데 언제까지 이들이 팔자(?)에도 없는 '군인'노릇을 해야 할까.

사람들은 인본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침략과 투쟁, 살육과 지배를 꿈꾼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계 어느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폭력과 전쟁. 이것이 끝장나는 날, 고야를 비롯한 화가들도 '집안을 장식하는 그림'을 마음 편하게 그리면서 일생을 마감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생생하게 고발한 이들의 그림은 오늘도 말없이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 더이상 변주되어서는 안된다'고.
#고야 #마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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