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총살>, 1814~1815, 프라도미술관
고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등불 앞에서부터 시내의 성문까지 장사진을 치고 있는 양민들이 줄을 지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양민들 앞에는 얼굴도 볼 수 없고 이름도 없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무장군인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무장하지 않은 수많은 양민들을 칼을 꽂은 총으로 사살하고 있는데, 굉장히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보인다.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양민들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주저앉을 듯, 혹은 반항의 몸짓으로 이 상황을 맞고 있어, 더욱 비극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림 왼쪽에는 벌써 처형당한 시체들의 피가 대지를 물들이고 있다.
그런데 가운데 흰옷의 지도자 같은 남자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는 두 손을 높이 쳐든 채 주먹을 쥐고 최후의 순간까지 반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희생자나 처형자들에 비해 그의 체구가 약간 부풀려진 것도 그렇다. 이는 그를 신성하고 희생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두 손바닥에는 자세히 보면 성흔(聖痕)이 찍혀있다. 이것은 그의 몸짓과 더불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결부시킨다.
프랑스군이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한 이 민간인 학살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졌다. 음침한 검은색과 회색과 갈색을 배경으로 뜨겁게 가열된 것처럼 빛을 내는 흰색과 황금색과 진홍색은 불운한 사내들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고야는 이처럼 '불멸의 사내들'과 명령에만 복종할 뿐, 인간성을 상실한 '살인기계'같은 부대원을 대조시킴으로써 전쟁의 참상과 야만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반도전쟁(1808~1814년)'이다. '반도전쟁'은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대륙 지배에 대항해 스페인 민중들이 독립을 위해 봉기하면서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반도전쟁'을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반도전쟁' 또는 '독립전쟁'은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한, 또 그것을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공화주의 수호'를 내세우며 시작했던 이 '나폴레옹 전쟁'은 그러나 나폴레옹이 절대권력을 장악하면서 전쟁의 목적 자체가 바뀌게 된다. 단순히 프랑스 자국의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전쟁'으로 바뀌게 된 것. 이는 스페인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1808년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키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앉힌 것. 그러자 5월 2일 마침내 마드리드 시민들이 침략자에 맞서 봉기했다. 이 봉기는 고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고야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처음으로 캔버스에 표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항상 인간 삶의 사악한 면모를 감지하고 있었고, 마침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으로 인해 그 '사악한 인간 삶'을 실체화시킨 셈이다. 명분이 어떻든 죽음과 기아를 필연적으로 양산할 수밖에 없는 전쟁,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인간을 학살하는 인간. 이 모든 것이 고야에겐 '사악' 그 자체였다. 전쟁으로 인해, 이 세계에서 이미 고착화된 파괴적이고 잔인한 지옥을 고야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었다. 즉 고야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성보다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을 그림에서 특별히 강조했다.
#제1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