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1일 서울 지하철 천호역 사거리에서 강동구청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명현 후보(앞줄에 선 사람) 유세를 지원하고 있다.
손병관
"그러니까 박근혜가 됐어야 했어! 큰 소리 뻥뻥 치더니 이게 뭐냐 말이야?"
"이명박인들 유가가 이렇게 오를 줄 알았겠어? 조금만 기다려봐!"1일 오후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해공공원에서 여유롭게 장기를 두던 두 노인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고 말싸움을 벌였다.
인근 노인정에 있다가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다는 이들은 조금 전에도 작년 대선의 '선택'을 놓고 한 차례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앙금이 잦아들던 차에 "구청장 보궐선거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기자의 물음이 또 다시 평지풍파를 일으킨 셈이다.
4일 이 지역에서 치러지는 강동구청장 보궐선거는 통합민주당 이해식(기호1번) 후보와 한나라당 박명현(기호2번) 후보, 무소속 장중웅(기호7번) 후보의 3파전으로 치러진다. 한 달 전만 해도 한나라당 후보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최근 여당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며 민주당으로 승부의 추가 기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강동구에서는 95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민주당 소속이었던 김충환 후보(현 한나라당 의원)가 구청장에 당선했지만, 김 후보가 98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로는 10년간 '한나라당 불패' 행진이 이어졌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도입 이래 줄곧 한나라당계 후보를 지지했다는 두 노인도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는 어김없이 한나라당에 표를 찍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는 김모 노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김 노인은 "죽으나 사나 한나라당이었는데, 이명박에게 속아 넘어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경남 사천에서 한나라당 지지하던 사람들이 일부러 좌파 후보(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를 이름...필자 주)를 밀어 이방호씨를 떨어뜨렸는데 그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고 말했다.
반면, '이명박 지지' 성향의 최모 노인은 "젊은 놈들 설치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한나라당을 계속 찍어야겠다"며 "대통령 뽑을 때 투표도 안 하던 인간들이 왜 이제 와서 거리에서 난리치는지 모르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대통령이 사람 쓰는 거 보면 나도 할 말 많다"고 하면서도 한나라당 후보의 이름을 거꾸로 뒤집어 "박명현이는 '현명박(지혜로운 이명박)'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놓지 않았다.
공원에서 만난 박제순(66)씨도 "이 대통령 지지율이 쇠고기 수입 문제 때문에 20%는 깎인 것 같다"며 "아무 생각 없이 대통령하는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나라당 호소 "지금 어렵다고 여당 안 찍으면 나라 더 어려워져"그러나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노년층과 달리 중·장년층은 날로 악화되는 민생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서울 도심을 흔드는 '쇠고기 시위'에 대해서도 "그게 그리 큰 이슈냐?"고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먹고살기 팍팍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기자의 해석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천호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임순지(47)씨는 대학생 딸과 등록금 문제로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임씨의 딸이 다니는 대학교 등록금이 한 해 1500만원 드는데 딸이 "야당이 대학 등록금 인상을 억제하는 법안을 제출했는데, 사학재단 눈치를 보는 한나라당이 반대한다"며 자신에게 "한나라당 찍지말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얘기다. "친구들과 함께 촛불시위 간다"는 딸을 말리지 못했다는 그는 "요새 분위기 험하다는데 몸 상하는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한나라당도 심상치 않은 민심을 느끼고 재보선 대책 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날 오후 고덕동 근린공원 유세에서는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이 "쇠고기 문제나 빨리 처리하라"고 일갈하는 30대 유권자 김모씨와 언쟁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김씨는 김 의원의 운전사 등 선거운동 관계자 4명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입술과 옷이 찢어지고 몸에 타박상을 입었다.
선거 패배 가능성을 의식한 듯 당 지도부의 지원유세도 자제하고 있다. 야당 시절과 달리 "이번 선거는 행정가를 뽑는 선거"라며 정치쟁점화를 피하려는 눈치다.
여당 선거운동 관계자들도 연일 신문·방송에 이명박 대통령 얘기가 나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어져야지, '이명박 대 반(反)이명박 구도'의 선거에서는 여당 표가 안 나온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출신 구청장들이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구청장직을 내던져 4년마다 보궐선거가 되풀이되는 것도 부담이 되는 대목이다.
강동을 윤석용 의원은 "전임 구청장이 내 자리에 욕심을 내고 중도사퇴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당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여당 선거운동 관계자들은 "한나라당 사람 때문에 또 치르는 선거인데 왜 후보를 냈느냐는 질문이 들어오면 난감하다"고 입을 모았다.
1일 오후 천호시장 사거리에서 한나라당 후보 지원유세를 온 나경원 의원은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다보니 제대로 교체되지 못한 게 많다. 저희가 무슨 자료 하나 찾으려고 해도 모든 자료가 여주 문서기록보관소에 들어가 버렸다"고 현 정부의 실정 책임을 노무현 정부에게 은근히 떠넘겼다.
나 의원은 "최근 쇠고기와 한미FTA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시는 걸 안다. 일부 과장된 부분도 있고 저희가 절차상 잘못한 부분도 있다"며 "지금 조금 어렵다고 한나라당에 투표 안 하면 나라가 정말 어려워진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정권 심판' 말하는 민주당 "지금 분위기에서 지면 정말 이상한 것"반면, 민주당은 강동구를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심판하는 '전략지역'으로 선정하고 바람 몰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