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전>겉그림
가람기획
지난 3일 오후 1시, '이방원'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경복궁에서 저자 이정근씨를 만나, 책 출간과 그가 생각하는 '태종 이방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처음부터 글이 굉장히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첫 작품인가?"내 작품으로는 처음이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기 전에 TV의 역사물 프로그램 대본을 썼다. 원래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 수많은 역사인물 중 하필 '태종 이방원'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혹시 이방원의 후손 아닌가?"(웃음)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런 쪽으로 전혀 관련 없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역사물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필생에 반드시 한번은 쓰고 싶을 만큼, 그리하여 평생을 연구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만큼 태종 이방원은 큰 존재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태종 이방원에 대해 썼다. 하지만 '권력의 화신'이나 '골육상쟁'과 같은 어떤 한 부분만을 다룬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만 최소한의 편향이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때문에 태종 이방원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과정을 최대한 담아보고 싶었다.
또 그의 큰 그릇, 즉 인간적인 매력과 고려에서 태어나 조선의 왕을 4명이나 만든 삶의 과정이랄까,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선비로, 선비에서 혁명아, 혁명아에서 왕으로, 왕에서 다시 상왕으로 바뀌는 대서사적인 삶에 끌렸다."
-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조차 이방원은 '골육상쟁'과 같은 면만 더 많이 기억하는 것 같다. 이방원은 어떤 사람인가?"오늘보다 내일을 중시했던 발전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을 등극시킨 것으로 이방원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몇 백 년 전 당시, 조선은 '세계의 모든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의 중국, 즉 명나라의 영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조선과 이방원에게 세자 양녕이 오늘이라면 충녕은 조선의 미래이자 내일이었다. 이방원을 쓰자고 마음먹고 자료를 찾아 글을 쓰는 동안 아버지로서의 혈육의 정을 단호하게 끊고 군주로서 충녕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깊은 고뇌를 보았다. 이방원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1996년부터 이방원에 빠져들어... 중국·일본에서 당시 자료 수집
- 조선에 태종 이방원은 어떤 의미인가?"이방원은 자신을 포함한 4명의 왕을 만들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태조 이성계와 세종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들에게 태종 이방원의 존재감은 매우 중요했다. 그 역할에 비해 가장 많이 축소된 사람이 이방원 아닌가 생각한다. 가령, 세종을 등극시킨 후 상왕으로 있으면서 실질적인 병권을 쥐고 대마도 정벌을 했지만 태종 몇 년이 아닌 세종 몇 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원은 조선사에 제대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 <이방원전>프로필에 '1996년부터 이방원에 빠져들었다'고 적혀있던데, 준비기간이 꽤 길었던 것 같다. "이방원에 대한 자료는 방대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 국내에 공개된 자료만 가지고도 몇 권의 책을 낼 수 있을 만큼 많다. 그렇게 자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권력의 화신이나 골육상쟁 등 부정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태종 이방원을 만나고 싶었다. 때문에 방대한 자료에서 옥을 찾아내는 작업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태종 이방원'과 다소 다른, 즉 묻혔던 그에 관한 진실을 많이 밝혔다는 평이다. 그런 자료들은 어떻게 구한 건가."국내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되, 중국에 가서 중국 역사 속의 조선과 태종 이방원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아울러 일본과 미국에 있는 그 당시 관련 자료들까지 최대한 수집, 이렇게 수집된 수많은 자료들에서 옥을 찾아 면밀히 검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되풀이했다. 국내 자료, 그것도 이제까지 알려진 자료들만 바탕으로 한다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그려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현재 <오마이뉴스>에 연재중인 '소현세자'도 마찬가지다."
97% 역사적 사실을 자신하는 <이방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