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한일수교 반대' 시위와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가 있었던 1964년 3월 26일 저녁 고려대 학생대표들이 <고대신문> 주최 좌담회에서 그동안의 투쟁을 평가하고 있는 사진.
고대신문
1964년 고려대 경영대 4학년 재학 시절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시 시국관을 보여주는 대학신문 기사가 발견됐다.
<오마이뉴스>가 최근 입수한 고려대 학보 <고대신문> 1964년 3월 28일자 4면에는 당시 고려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학생회 간부 7명이 참석한 좌담회 기사가 실렸다. 7명 가운데는 이 대통령(당시 경영대 학생회장)과 함께 진보진영의 이론가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당시 정치외교학과 4학년)가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3월 들어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 4월 조인 → 5월 비준'이라는 로드맵을 제시했는데, 이같은 발표는 3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지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특히 서울에서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5000여명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총리의 허수아비를 화형에 처하고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을 점거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지만, 박 대통령은 3월 26일 정오 담화를 통해 대일 협상을 계속할 뜻을 천명했다.
<고대신문> 주최 좌담회는 3일간의 투쟁에 대한 학생대표들의 평가를 담고 있는데, 이 대통령과 최 교수 외에도 박정훈 전 민주당 국회의원(당시 정치외교학과 4학년), 구자신 쿠쿠전자 회장(당시 경제학과 4학년) 등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 "매판자본 발호 등 대일경제 예속 극히 우려"이 대통령의 좌담회 발언 중에는 한일 국교정상화의 좌초가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사회자인 <고대신문> 편집국장이 "그날(3월 24일)의 구호 중 '매판자본 타파', '일인(日人)상사 추방'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지금 한국경제계에 미치는 영향을 말해달라"는 요구에 이 대통령은 "한일회담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을 반대한다면 우리 경제계의 타격은 짐작할 만하며 서쪽의 중공문제도 화급(火急)할 것입니다. 단, 일인(日人)상사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재미롭지 못한 것들이 벌써부터 발호하고 있어 일본에 의한 경제적 예속을 극히 우려하는 바입니다. 미국의 대한원조태세는 점점 모호해져가 2~3년 내로 중단된다고 하는데, 미일간의 이러한 묵계로 하여 일본은 점점 고자세를 취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한국을 계속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태도가 가장 긴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비해 최장집 교수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철저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내쇼날 데모크라시'(민족적 민주주의)의 현실태는 어떻다고 보느냐"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최 교수는 "민족주의는 권력과 파시즘에 도전하는 젊은 세대와 학생의 강력한 의사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며 "이것은 곧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고 민중을 발언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답한다. 최 교수는 그러면서 "민중을 떠난 '민족적 민주주의'는 거짓"이라고 강조했다.
1964년 학생운동 대열에 함께 있었지만, 나중에 현대그룹 CEO와 진보성향 대학교수로 대조적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의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좌담회 중간에 이 대통령이 "결론적이고 종합적으로는 이 담화(3월 26일 대통령 담화 - 필자 주)를 통해 본다면, 이번 데모의 의의는 상실되었으며 정부에 아무런 반응도 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고, 참석자들도 이에 동의를 표시한다.
이후 고려대 학생대표들은 이 대통령 등의 제의로 그해 6월 2일 구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박정희 타도' 투쟁에 나섰다. 이튿날 서울 도심에서 학생과 시민 등 3만여명이 모이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박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이날 시위는 '6·4 사태'라는 파국을 맞았다.
이 대통령은 6·10 촛불대행진 다음날 "학생 때 나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던 민주화 1세대"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학생시절 '박정희 하야'를 외쳤던 대통령이 4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