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보다 비정규직 확률이 높은데..."
 촛불에 가려진 그들은 오늘도 절망한다

비정규직법 1년... 다시 세워진 이랜드·KTX 여승무원의 천막

등록 2008.07.04 09:30수정 2008.07.0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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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6월 28일 오후 기륭전자 해고노동자 및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기자회견을 한 뒤 청와대 방향으로 3보1배로 진행하다가 경찰에 막혔다. 이들은 청계천 모전교를 거쳐 종로구청과 연합뉴스 앞쪽으로 갔지만 또 경찰에 막혔다.

지난 6월 28일 오후 기륭전자 해고노동자 및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기자회견을 한 뒤 청와대 방향으로 3보1배로 진행하다가 경찰에 막혔다. 이들은 청계천 모전교를 거쳐 종로구청과 연합뉴스 앞쪽으로 갔지만 또 경찰에 막혔다. ⓒ 안홍기


"촛불을 보면서 절망을 느꼈다."

3일 만난 김경욱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의 말이다. 촛불정국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설 자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 앞과 서울역광장에는 조그마한 천막이 차려졌다. 하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았다. 이랜드 노조와 KTX 여승무원들의 천막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로 세운 마지막 천막"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방송 화면과 신문 지면에선 보이지 않았다. 언론엔 온통 '촛불' 뿐이었다. 일부 매체가 7월 1일 비정규직법 시행 1년을 맞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보도했지만,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얼마 없었다.

3일 오후 이랜드 노조원과 KTX 여승무원들의 천막을 찾아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이들은 "계속 관심을 갖는 고마운 분들도 있지만, 어느덧 사람들에게 잊혀진 것 같아 야속하다"고 전했다.

[KTX 여승무원] "가끔, 어떻게든 투쟁을 끝내고 싶다"

 3일 오후 KTX 여승무원들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과 서울역광장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3일 오후 KTX 여승무원들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과 서울역광장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이날 오후 2시 서울역 입구에서 한 KTX 여승무원이 '사법기관도 인정했다, KTX 문제 해결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시민들은 빠른 속도를 그를 지나칠 뿐, 관심 갖는 이는 없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서울역광장으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 앞에도 전단지를 나눠주는 KTX 여승무원들이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KTX 여승무원입니다'라고 쓰인 노란 티셔츠가 눈길을 사로잡았고, 전단지엔 촛불을 든 이들의 모습이 선명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광고 전단지라고 생각하는 듯 손사래를 쳤다. 받더라도 '의무적'으로 받았다. 한 시민은 전단지를 보자 "촛불이네"라고 말했다. 850일 넘도록 투쟁 중인 KTX 여승무원들은 말이 없었다.


서울역광장에 천막이 차려진 건 지난 1일. 오미선 철도노조 KTX 승무지부 대표는 "작년 여름 이곳 에서 단식을 했는데, 다시 여름에 천막을 차렸다"며 "날씨도 그렇고, 밤에 노숙자들이 많이 찾아와 힘들다"고 말했다.

그들의 천막을 삼킨 촛불에 대해 물었다. 그는 "언론에 많이 나온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며 언론의 무관심에 담담한 듯 말했다. 이어 "시민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자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KTX 여승무원들은 지난해 12월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이 제안한 '역무계약직'을 받아들여 사태 해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이철 당시 사장이 합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약속은 다시 한 번 깨졌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일까, 투쟁 인원이 올해 초 80여명에서 현재 50여명으로 줄었다. 

오 대표는 "'비정규직의 꽃'이라는 언론의 보도가 무척 부담이 된다, 제3자가 그렇게 부른 긴 쉽다"며 "가끔 어떻게든 투쟁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며 솔직한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KTX 여승무원 한아름(28)씨는 벌써 2번이나 유산을 했다. 한씨는 "다들 투쟁이 길어지니 몸이 성한 데가 없다, 다들 여성질환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촛불에 대해서도 희망적으로 보고 싶다고 했다.

"20대 초중반이었던 우리들은 20대 후반이 됐다. 엄마가 된 친구들도 있다. 기약 없는 싸움이 너무 힘들지만, 이젠 투쟁이 길어져 고통에 무뎌졌다. 지금까지 한 게 있어서 포기 못한다. 그러면 무척 억울할 것 같다. 촛불문화제에 가면 우릴 알아봐 준다. 희망은 있다."

[이랜드노조] "비정규직도 나의 문제인데..."

이어 오후 4시,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 앞에 세워진 이랜드 노조의 천막에는 3명의 노조원이 선전전 피켓을 만들고 있었다. 할인점에서 나온 시민들은 '이랜드는 비정규직 무덤'이라고 쓰인 이들의 천막을 무심히 지나쳤다.

1년 전인 지난해 6월 30일 이랜드 노조원 800여명이 20일 동안 이 곳을 점거하며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 그 때의 함성을 오고간데 없고, 외로운 천막만 그 때의 흔적을 더듬었다. 이 곳 경비도 당시 수십 대의 경찰버스에서 경찰 2명으로 바뀌었다.

이랜드 노조원 황선영(43)씨는 "점거 1주년인 지난달 30일 '큰 마음' 먹고 천막을 치려했는데 너무 쉽게 쳤다, 홈에버 경비팀도 경찰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며 "무척 허탈했다"고 전했다.

이랜드 노조 스스로도 힘이 많이 떨어진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황씨도 "생계로 복귀해야 하는지, 계속 싸워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고 밝혔다. 현재 투쟁에 나서는 노조원은 150명.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함께 했던 정당·시민단체에서도 발길이 뜸해졌다. 촛불 때문이다. 그래서 이랜드 노조원들은 촛불문화제에 나가 자신들의 싸움을 알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황씨는 "일부 시민들이 우릴 보고 촛불문화제 순수성이 훼손된다고 해 힘이 빠진다"며 씁쓸해했다.

옆에 있던 최승진(38)씨는 "비정규직 문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만큼이나 '나의 문제'인데, 비정규직 문제에는 왜 관심을 가지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내 아이가 광우병에 걸릴 확률보다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더 높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촛불에 절망을 느낀다"... 촛불 뒤에 가려진 비정규직 절망

 3일 오후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이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 인근에 세워진 천막 앞에서 "촛불을 보니 절망스러웠다"고 말했다.

3일 오후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이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 인근에 세워진 천막 앞에서 "촛불을 보니 절망스러웠다"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오후 5시가 넘자 홈플러스 동대문점에서 집회를 연 후, 천막으로 돌아온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6월 23일 이랜드 투쟁 1주년 문화제 때 "촛불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고 말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 아직도 '촛불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나?
"그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요즘 장기투쟁사업장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면 '촛불 때문에 뭘 해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투쟁 1040일을 넘긴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단식, 고공농성 등 별짓을 다 해도 보도가 안 된다. 그런 것 보면서 절망스러웠다.

일부 언론에서 7월 1일 비정규직법 시행 1년을 맞아 심층 보도했지만 주목을 못 끌었다. 얼마 전, <한겨레> 기자가 전화해 '이렇게 많은 지면을 통해 보도했는데 이슈화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 우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촛불문화제 의제가 대운하 등으로 다양화 됐다.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노력했다. 누구보다 먼저 서울광장에 천막을 치고 비정규직 피켓도 만들었다. 시민들은 우리들의 뜨거웠던 지난 여름의 투쟁 때문인지 '이랜드 아직 안 끝났네'라는 반응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이어 그는 "민주노총은 6월 비정규직노동자대회 의제를 미국산 쇠고기 반대로 만들어버렸다, 화물연대도 자신들의 생존권 문제를 내걸어 호응을 받지 않았느냐"며 "우리도 우리의 생존을 걸고 싸우는데, 민주노총 총파업에 비정규직은 아예 없다, 절망스럽다"고 전했다.

이랜드 투쟁은 현재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홈플러스가 홈에버 인수 절차를 밟고 있다. 김 위원장은 "8월 중순께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 결합 승인해줄 것 같다"며 "홈플러스 사장이 인수가 끝나면 우릴 만나겠다고 했으니,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절망을 또 한 번 언급했다.

"홈플러스도 지난해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 해야 했을 때 생색만 냈던 곳이다. 한해 순수익 650억원인 홈플러스가 1조 3000억원의 빚이 있고, 이자 비용만 한해 2000억원이 나가는 홈에버를 5000억원을 차입해 인수한다.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오후 6시 그와 헤어졌다. 이 날도 어김없이 서울광장에 촛불이 몰려들던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천막엔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비정규직 #비정규직법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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