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고 싶은 집', 북촌에서 답을 얻다

숨결이 머무는 공간 '청원산방'

등록 2008.07.05 11:24수정 2008.07.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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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개의 공구들 심용식씨가 40년간 써 온 수백 개의 공구들을 볼 수 있다. ⓒ 손은영

비 내리는 지난 수요일(2일) 오후,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청원산방'을 찾았다. '맑고 둥글다'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꽃살문 창호 제작의 귀재'라 불리는 소목장 심용식씨가 만든 공간이다.

40년째 나무를 만지는 그는 낡은 1930년대 한옥을 개조해 누구나 쉽게 전통 한옥을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문을 들어서자 초정(艸丁) 권창윤 선생이 쓴 현판이 나를 맞이한다. '계수헌(桂樹軒)'.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 곱게 휜 소나무와 'ㄷ'자 형으로 작은 정원을 품은 집의 모습은 정말 다른 세계에 온 착각을 일으킬 만했다.

더불어 서민의 집과 궁궐을 넘나드는 가지각색의 창호는 40년째 한길을 걸어 온 장인의 솜씨를 한눈에 알아보게끔 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하셔도 됩니다. 사진도 마음놓고 찍으시고요. "

완자살과 격자살이 어우러진 반쯤 열린 창호문으로 가장 먼저 보인 공간은, 그가 지금껏 사용한 공구를 모아놓은 곳이다. 수백개의 크고 작은 공구들은 쓰임에 따라 분류되어 빼곡이 나열돼 있었다. 공방의 한가운데에 놓인 작업대엔 한창 대패질 중이던 격자무늬 창호가 비스듬히 서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호를 모아놓은 곳 같네


"이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이용해서 작업을 합니다. 요즘엔 잘 사용하지 않는 아주 예전의 것들도 있지요."

보통사람이 보기엔 쓸모없는 나무토막으로 보일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에 세월의 손때가 묻어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공구들 모두 쓰임이 다르다고 하니, 문외한이 보기엔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당에 서서 집을 둘러보면, 이곳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호를 모아놓은 곳 같다. 서로 다른 무늬의 창호가 연달아 있으면서도 어느 곳 하나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란다.

"지금 이것 말고도 수많은 창호가 더 있죠. 그래서 1년에 한번씩 모든 창호를 교체할 겁니다. 앞으로 이곳은 아름다운 전통 기법을 체계적으로 관람하실 수 있는 공간이 될 거예요. 외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봐도 한옥의 멋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말이 좋아 '관람'이지 엄연히 부엌까지 딸린 살림집에 어찌 냉큼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망설이는 나에게, 아직은 이곳에서 살지 않으니 마음 놓으라며 오히려 앞장섰다. 쭈뼛쭈뼛 들어선 집 안에선 내리는 비로 눅진해진 공기와 함께 진한 소나무향이 풍겼다. 인위적으로 향수를 뿌렸는가 착각하며 재차 물었을 만큼 진한 향이었다.

"건축자재로 쓰인 춘양목에서 자연적으로 나는 향입니다. 이렇게 나무에서 좋은 향이 저절로 나오니 당연히 아토피 등의 피부병도 사라지죠."

그는 요즘 사람들이 꿈 꿀만 한, 말 그대로 '살고 싶은 집'을 만들었다. 한옥의 가장 큰 단점인 단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중으로 된 창을 쓰고, 바닥은 구들장 대신 편리성을 위해 보일러를 깔았다. 사람들이 우려할 만한 점을 고려하고 촘촘히 설계한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편리함이 어우러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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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문과 꽃완자문 소박한 세살문 안쪽에 화사한 꽃완자문을 배치했다. ⓒ 손은영

이렇게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위한 세심한 배려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창호에 얇은 비단을 붙여 모기를 막고, 경복궁 자경전의 기둥을 1/10로 축소해 볼품없는 수돗가를 운치있는 장소로 바꿨다.

또 사람의 드나듦을 배려해 미닫이 문은 양쪽으로 함께 열리도록 만들고, 안방의 베란다 구실을 하는 난간도 낙선재의 것을 나란히 본따 전통 난간의 아름다움을 살렸다.

무조건적인 전통 고수는 아집일 뿐이다. 역사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전통방식은 이미 현대인의 삶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PDP TV와 전통창호가 공존하는 곳. 오로지 전통 추구만을 위해 장인의 고집으로 지어진 집은 그곳에 없었다. 한국 고유의 전통과 현대의 편리함이 어우러진 집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진정 '살고 싶은 집'이 아닐까.

요즘 불투명한 미래의 한 시점을 귀농으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멀지않은 미래에는 '청원산방'처럼 전통에 뿌리를 두고 현대적 양식으로 발전한 집이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뿌리를 잊지 않고 지켜내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얼마든지 다채로운 가지가 생겨날 수 있음을 '청원산방'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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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목장 심용식씨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옥을 볼 수 있도록 이곳 '청원산방'을 만들었습니다." ⓒ 손은영


- 경복궁 태원전, 경주 불국사, 영국 대영박물관 내에 지어진 한옥 '사랑방' 등 고전 복원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네요.
"약 500여 곳에 참여했을 겁니다. 창호 제작이 제 전문분야긴 하지만, 아마 우리나라 보물 가운데 제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을 거예요."

- 이곳 '청원산방'에 가장 특이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기존의 한옥을 수리해서 만든 집인데 공사하며 나온 나무를 단 한토막도 버리지 않고 재활용했습니다. 낙선재의 것을 본 따 만든 난간을 제외하면 모두 기존에 있는 나무로 만든 것이지요."

- 집안 곳곳에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집니다.
"집안 기둥의 구석을 기어오르고 있는 거북이 두 마리가 보이시죠? 거북이는 장수를 상징합니다. 안방 난간의 박쥐와 마당벽의 십장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십장생 벽화는 황토로 구운 것으로 자경전 벽화를 그대로 본 따 궁궐의 아름다움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곳에서 서민의 집과 궁궐을 모두 체험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웰빙'을 외칩니다. 바로 이렇게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집이 미래 집의 형태가 아닐까요.
"저도 그걸 바라며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옥을 볼 수 있도록 이곳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힘들다고 잘 배우려 하지 않아요. 나이가 좀 지긋한 분은 끝까지 배우려 하는데 말이죠. 한옥의 전통을 배우려는 제자가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청원산방 #심용식 #한옥 #북촌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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