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귀가하는 노동자들>고된 노동을 마친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몰려나온다.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둡다. 뭉크는 이들에게서 근대 문명의 불안을 포착했다. 거칠고 신경질적인 선과 어두운 색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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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자위도 소용없을 때가 종종 있다. 창조적 영감을 위한 여유는 없고, '예술적'이어야 할 일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편집은 예술'이라는 소신을 가진 나는 시간이 갈수록 지쳐간다.
지친 몸을 이끌고 출퇴근할 때는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되나 고민하기 일쑤다. 그럴 땐 뭉크의 그림 <귀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도 이 저주스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까 하는 물음에 닥치면 소심하게도 그냥 말없이 다시 출근길에 나선다.
내가 편집을 맡은 원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는 우리가 매일 겪는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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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출근 인파로 가득 찬 만원 버스 속에서 1시간 이상을 선 채로 갇혀 있어야 했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의 얼굴을 읽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모두 노동의 고통을 호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밝은 표정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노동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우리는 왜 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왜 우리는 노동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현재 노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저자 서문에서노동에 대한 강박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우리는 왜 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하는 질문은 강하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자 노명우 의 분석은 한줄기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노명우는 우리가 언제나 노동을 중시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우리처럼 '일에 미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을 멀리했다. <성경>은 노동을 신이 내린 형벌로,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저주받은 행동이라 경멸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 365일 중 70일만 노동했고 중세 사람들은 단지 계절에 맞춰 간헐적으로 일했다.
그럼 노동에 대한 찬미는 언제 생겨난 것일까? 노동을 찬양하고 근면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근대 시장경제 체제가 들어서면서 생겨난 문화 현상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노동은 가장 낮고 미천한 지위에서 인간 활동 중 최고의 지위로 갑작스럽고도 눈부시게 상승했다.
사상사를 보아도 노동은 근대에 들어서 눈부시게 찬양받았다.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는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주장하면서 노동의 지위를 한껏 높였다. 인간의 본질을 노동하는 존재로 규정한 마르크스에 와서는 노동의 지위가 절정에 달했다.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강철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노명우는 베버의 저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친절하게 해설하며 이러한 노동의 지위 변화를 가져온 대전환을 추적했다. 자본주의 노동윤리의 기원을 파헤친 베버의 저작이야말로 그 일에 꼭 맞는 텍스트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정신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적응해야 하는 외적 환경이다. 베버는 우리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강철 감옥' 속에 갇히게 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의 예언대로 노동윤리로 무장한 채 고된 노동을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