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서리 맞은 포도새순예쁘게 피어야 할 포도순과 잎이 늦서리로 거무죽죽 오그라 들어 있다.
이종락
이렇게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봄이 되자 가지에 새순은 하나 둘 돋아났다. 포도 새순을 보면서 눈이 즐겁던 4월 하순의 어느 날, 늦서리가 내렸다는 소식에 온 동네가 뒤숭숭해졌다. 포도밭에 얼른 가보라는 이웃의 다그침에 부리나케 달려 가보니 예쁘게 피어야 할 포도새순이 서리를 맞아 거무죽죽 오그라들어 있었다.
처음 지어 보는 포도농사에 난생 처음 당해 보는 서리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뭐가 뭔지 모르는 초보농부에게 서리는 특별하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어~ 서리 좀 맞았네' 그런 정도였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다음날, 서울의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뉴스를 보니 일부 지역이 늦서리를 맞아 올해 과수 농사 망쳤다는데 어떤지 걱정되서 한 안부 전화였다. 서리 맞으면 그 피해가 3년 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이 서서히 와 닿기 시작했다.
'아~ 올해 1년 농사가 이렇게 한방에 날아가는 구나.'조금 있다 포도작목반 총무가 오더니 포도피해실태를 알려 달라면서 주소지를 적어 갔다. 갑자기 발이 땅에서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야? 아무리 농사가 하늘의 뜻이라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1년의 할 일이 날아가도 되는 것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 앞에 멍해질 뿐이었다. 일찍이 비 가림 비닐만 쳤어도 서리피해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도 들었으나 이미 차는 떠난 후였다.
이러다 남들처럼 2년 만에 보따리 싸는 거 아냐?며칠 후 다시 온 작목반 총무는 포도밭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포도상자 주문을 취소하라고 일러주었다. "10%도 살리기 힘들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암담했다. 도시의 월급쟁이로 따지면 1년 연봉을 삭감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머릿속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귀농을 했는가 하는 원초적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여유 돈 갖고 전원주택 지어 소일하러 온 낭만파 귀농도 아니고,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생계형 귀농인데, 몸을 쓰는 노동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도전한 귀농 2년차 농사는 시작도 못해보고 주저 앉는 걸까? 서리맞은 포도밭을 보고 경제적 불안감으로 뒤숭숭했다.
'아~ 이러다 나도 남들처럼 2년 만에 보따리 싸는 것 아닌가?'아내 앞에서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내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내와 나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귀농 2년차에 이렇게 큰 시련을 겪는 것도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고 다짐했다. 처음 당하는 서리 피해에 온 마을이 뒤숭숭했지만, 처방은 제각각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우리 포도밭이 두 번째로 피해가 크다고 했다. 포도농사 10년 지었다는 주민도 이런 늦서리 피해는 처음이라며 올해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한 숨을 쉬었다.
문제는 서리 피해 이후, 저마다 다른 처방을 내 놓는 포도박사(?)들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했다. "영양제를 줘라", "소용없다", "빨리 서리 맞은 가지를 쳐내라", "조금 기다려 봐라" 등등. 그러나 결국 농사는 본인이 알아서 판단 할 일이었다.
아내는 어디 가서 이말 듣고 오면 불안해지고, 저 말 듣고 오면 또 급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아내 때문에 처방을 놓고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서리 맞은 포도밭이라도 1년 농사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해야 할 일은 끝이 없었다. 평소 관리가 부실했던 포도나무라 가지치기, 포도순 정리까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에 하루 종일 포도밭에 서서 일하다 보면 어깨, 허리, 팔 등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하루 종일 포도밭일로 고단한 몸을 끌고 집에 들어오면 세상은 온통 광우병과 촛불이었다. 서울의 한 선배가 전화 통화에서 "지금 촛불을 들어야 할 사람이 포도농사를 짓고 있네"라는 반농담조의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노동의 수고와 땀 흐르는 곳 어디나 역사의 현장 아니겠냐?"고 응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약도 치고 거름도 주면서 이렇게 5월과 6월은 포도밭에 파 묻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여보! 포도 알이 굵어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