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50) 벽보 붙이지 마세요

[우리 말에 마음쓰기 382] ‘굶주림’과 ‘헝그리’

등록 2008.07.24 10:23수정 2008.07.2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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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굶주림’과 ‘헝그리’

 

.. 굶주림의 정신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면 스포츠의 경우에도 굶주림의 정신에서 힘이 나옵니다. 원래 생물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가는 일에 성실히 승부를 거는 것과 배가 고프다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인간의 몸도 굶주린 상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한살림,1993) 16쪽

 

 책을 읽다가 피식 웃습니다. “굶주림의 정신”이라. 참 재미난 말이구나. 우리가 언제부터 배불리 살았다고 벌써 힘알이가 빠진 채 이리 비틀 저리 비틀인가.

 

 ― 헝그리(hungry) 정신

 

 생각해 보면, 권투선수를 비롯한 운동선수들은 하나같이 ‘헝그리 정신’으로 싸웠다고 이야기합니다. 헝그리, 헝가리. 나라이름 ‘헝가리’와 비슷해서 말놀이를 하기도 하고.

 

 ┌ 원 투 스트레이트 잽 어퍼컷

 └ 하나 둘 뻗고 가볍게 올려쳐

 

 모르는 일이지만, 운동경기에 온삶을 바친 이들이 ‘원 투 스트레이트’나 ‘플라이볼 그라운드볼’이라 하지 않고 ‘하나 둘 뻗고’나 ‘뜬공 튄공’이라 했다면, ‘헝그리 정신’이 아니라 ‘배고픈 마음’이나 ‘굶주리던 마음’으로 땀을 흘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배고픈 마음

 ├ 굶주리던 마음

 ├ 굶던 생각

 ├ 배곯던 생각

 ├ 가난했던 생각

 └ …

 

 생각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하는 일이 달라집니다. 하는 일이 달라지면 자기한테 돌아오는 열매나 보람이 달라집니다.

 

 생각을 어떤 말로 담아내느냐에 따라서 말씨나 말투가 달라집니다. 말씨와 말투가 달라지는 흐름에 따라서 이웃한테 끼치는 영향이 달라지며, 이 달라지는 영향에 따라서 말 문화가 달라집니다.

 

ㄴ. 벽보 붙이지 마세요

 

 일 때문에 어느 동네 골목길을 지나가던 때였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쉴 틈 없이 드나드는 차 때문에 자주 한쪽 구석으로 비켜서고 다시 걷고 하며 걸었습니다. 그렇게 비켜서곤 하던 어느 때, 한쪽 구석에 비켜서 있으며 차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제가 선 자리 옆에 붙어 있는 종이쪽지 한 장을 봅니다.

 

 ― 벽보 붙이지 마세요

 

 손글씨가 아닌 인쇄기로 뽑은 글씨로 적힌 “벽보 붙이지 마세요” 한 마디. 이 동네 벽에 광고쪽지를 너도 나도 붙이고 있었는가 봅니다.

 

 ― 벽보 부착금지

 

 다시 길을 갑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관공서 같은 데 벽에다가 광고쪽지를 붙였다면 ‘부착금지’라고 적은 쪽지를 붙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들 느낌이 다르잖아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마셔요” 하고 적은 쪽지를 붙이면 우습게 보지만, “쓰레기 투기금지”나 “쓰레기 투척금지” 하고 적은 쪽지를 붙이면 조금은 무섭게 느낍니다. “들어오지 마세요” 하고 적어 놓으면, 오히려 궁금하게 여기면서 들어오고, “출입금지” 하고 적어 놓으면, 들어가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말로 하면 부드럽다고 느끼고, 한자말로 하면 딱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토박이말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껴안고, 한자말은 사람들을 차갑게 내몬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생각해 보면, 지난날 이 나라 권력자들인 임금이나 사대부나 양반들은 오로지 한문을 쓰면서 백성을 억눌렀습니다. 짓눌렀습니다. 여느 사람은 알아먹지 못할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업신여겼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계급이 사라졌지만, 말과 글로 누리는 권력은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학문에 따라 나뉘는 자리가 아니라 ‘좀더 어려운 말을 쓰는’ 자리로 나뉘어 있을 뿐입니다. 지식을 다루는 분들 말과 글은 ‘똑같은 생각을 더 어렵게 느껴지는 말로 담아내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잦습니다.

 

 법이든 경제든 정치든 학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 책도 마찬가지요, 예술을 다루는 책도 매한가지요, 문학을 펼치는 책도 똑같습니다. 껍데기는 한글일지 모르나 속살은 토박이말이 아닌 한문이기 일쑤이며, 이 한문은 우리 삶을 옥죄거나 목아지를 비틀거나 지식자랑으로 우쭐거립니다.

 

 ┌ 붙이지 마셔요 / 들어오지 마셔요 / 버리지 마셔요 / 하지 마셔요

 ├ 붙이지 마라 / 들어오지 마라 / 버리지 마라 / 하지 마라

 ├ 붙이지 좀 마 / 들어오지 좀 마 / 버리지 좀 마 / 하지 좀 마

 ├ 붙이면 죽어 / 들어오면 죽어 / 버리면 죽어 / 하면 죽어

 ├ 붙이면 가만두지 않음 / …

 ├ 붙여만 봐 / …

 └ 붙이지 말래두 / …

 

 “벽보 붙이지 마셔요”로는 말을 듣지 않으면 “벽보 좀 붙이지 마라, 잉?” 하고 적어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붙이면, “벽보 붙이면 죽어?” 하고 적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용용 죽겠지 하듯 붙이면, “붙이면 구슬 떼 버린다” 하고 적어 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붙이는 놈 비디오로 찍고 있으니 알아서 해!”쯤은 적어야 말귀가 트이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7.24 10:2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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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쓰기 #우리말 #우리 말 #토박이말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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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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