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털기 (43) 철천지원수

[우리 말에 마음쓰기 390] ‘지인’과 ‘아는 사람’

등록 2008.08.01 11:52수정 2008.08.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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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철천지원수

.. 피렌체 사람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도 나오는데, 망명 중인 단테와는 철천지원수였다고 한다 ..  《시몬 비젠탈/박중서 옮김-해바라기》(뜨인돌,2005) 230쪽


“망명(亡命) 중(中)인”은 “망명하고 있는”이나 “(다른 나라로) 떠나 있는”으로 다듬어 줍니다.

 ┌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히게 한 원수
 │   - 적어도 몇 년간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등을 돌리게 마련이었다
 │
 ├ 단테와는 철천지원수였다고 한다
 │(1)→ 단테와는 서로 사무친 원수였다고 한다
 │(1)→ 단테와는 끔찍히 갈라선 원수였다고 한다
 │(1)→ 단테와는 둘도 없는 원수였다고 한다
 │(2)→ 단테와는 사이가 대단히 나빴다고 한다
 │(2)→ 단테와는 둘도 없이 나쁜 사이였다고 한다
 └ …

‘원수’라는 말을 그대로 두면서 (1)처럼 다듬어 봅니다. ‘원수’라는 말을 손보면서 (2)처럼 고쳐써 봅니다. ‘원수’란 ‘원한(怨恨)’이 맺힌 사람을 가리키고, ‘원한’이란 “응어리진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리하여, 한자말 ‘원수’를 그대로 둘 수 있는 한편, “응어리진 사이”나 “몹시 미운 사람”으로 걸러낼 수 있습니다.

 ┌ 몇 년 간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
 │→ 몇 해 동안은 끔찍하게 미워하여
 │→ 몇 해 동안은 응어리가 맺혀
 │→ 몇 해 동안은 사무치게 미워하여
 └ …

“둘도 없이” 미운 사람이니 얼마나 보기 싫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다시 없이” 몸소리쳐질 사람이니 얼마나 미우랴 싶습니다. “사무치게 미우니” 꿈에 볼까 두렵고, 꿈에서조차 “꼴 보기 싫”으리라 봅니다. 꼴 보기 싫으니, 어쩌다가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이를 갈”고 “눈에 불을 켭”니다. 서로 “으르릉거리는” 사이로 지내며 모진 말을 퍼붓습니다.


ㄴ. 지인

.. 몰론 몇몇 지인들이야 있었지만, 내가 옮기고자 한 지역은 아니었다 ..  《작은 것이 아름답다》 125호(2006.10.) 59쪽


‘지역(地域)’은 ‘곳’으로 고쳐씁니다. ‘물론(勿論)’은 ‘뭐-그럭저럭-이래저래’나 ‘두말할 것 없이’로 손봅니다.

 ┌ 지인(至人) : 더없이 덕(德)이 높은 사람
 ├ 지인(至仁) : 더없이 인자함
 ├ 지인(知人)
 │  (1) 아는 사람
 │   - 도현의 가족뿐 아니라 그 친척과 지인 관계까지도 세밀히 파악하고
 │  (2)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아봄
 ├ 지인(知印) : [역사]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과 도평의사사에 속한 구실아치
 ├ 지인(指印) = 지장(指章)
 ├ 지인(智仁) : [역사] 통일 신라 시대의 중
 ├ 지인(智印) : [불교] 보살의 지혜(智慧)를 나타내는 표지인 인계(印契)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지인(遲引) = 지연(遲延)
 │
 ├ 몇몇 지인들이야 있었지만
 │→ 몇몇 아는 사람들이야 있었지만
 │→ 몇몇 사람을 알았지만
 │→ 아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 …

국어사전은 역사사전이 아닙니다. 인물사전도 아닙니다. 백과사전도 아닙니다. 백과사전은 백과사전다워야 하고 인물사전은 인물사전다워야 합니다. 역사사전 또한 역사사전다워야겠지요. 국어사전은 국어사전답게 올림말을 고르고 말풀이도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전은 저마다 제구실을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 가운데 국어사전처럼 제구실을 못하는 사전은 없다고 느낍니다. 정작 다루어야 할 낱말풀이와 보기글 쓰임새는 대충 달아 놓거나 돌림풀이(순환정의)가 되기 일쑤이고, 기본 낱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토박이말은 업신여기고 한자말을 우러르는 데다가, 프랑스 역사학자와 영국 철학자 이름까지 싣고 있으니, 이 무슨 국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모두 여덟 가지 한자말 ‘지인’이 실려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쓰고 있는 지인은 몇 가지가 되며,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실어 놓을 만한 지인은 또 몇 가지가 될까 헤아려 봅니다.

글쎄, 제가 보기로는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나마 “아는 사람”을 뜻하는 ‘知人’ 하나 올릴 수 있다고 할 분들이 있을 텐데, ‘知人’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국어사전에 이 낱말을 싣는다고 한다면 ‘외국어’로 실어야지 ‘우리 말’로는 실을 수 없습니다.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한자말 ‘知人’을 받아들여서 쓰는 우리들 한국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토박이말 ‘아는이’나 ‘아는사람’을 새말로 빚어내어, 누구나 알아보기 쉽고 쓰기 수월하도록 말 문화를 다스려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또는 “아는 사람”이나 “아는 분”이라는 말을 관용구로 다루어 국어사전에 실을 수 있습니다.

 ┌ 그 친척과 지인 관계까지도
 │
 │→ 그 친척과 아는 사람까지도
 │→ 그 살붙이와 아는 사람까지도
 └ …

덕이 높으면 덕이 높다고 할 일이고, 마음이 어질면 어질다고 할 일이며, 마음이 따뜻하다면 따뜻하다고 할 일입니다. 우리한테는 ‘지인(遲引)’도 ‘지연(遲延)’도 아닙니다. ‘늦어지다’나 ‘질질 끌다’나 ‘더디어지다’입니다.

국어사전이 국어사전 구실을 제대로 못하니, 올림말이 엉망이요, 우리들 말씀씀이마저 적잖이 영향을 받아 엉망이 된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한테 가장 알맞는 일거리와 놀잇감을 찾아야 하듯, 우리가 쓰는 말도 때와 곳에 가장 알맞는 말을 잘 살피고 찾아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쓴다고 해서, 뜻만 얼추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을 그럭저럭 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돈만 번다고 다 할 만한 일이 아니며, 돈이 된다고 해서 아무 짓이나 다 해도 되지 않듯, 한자로 얼기설기 엮어 놓았다고 죄다 ‘한국말’이라도 되는 양 함부로 국어사전에 실어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 쓰면 좋을 말과 우리 삶이며 발자취를 담은 말을 싣는 한편, 우리 스스로 우리 삶과 생각을 갈고닦거나 가꾸는 데에 도움이 될 말을 실어야 하는 국어사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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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우리말 #우리 말 #한자 #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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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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