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잔잔한 행복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자연에 취해서...

등록 2008.08.06 18:00수정 2008.08.06 18:0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도시의 높다란 빌딩과 얽히고 설킨 전선 아래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살구 ⓒ 김정애

도시의 높다란 빌딩과 얽히고 설킨 전선 아래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살구 ⓒ 김정애

 

도심의 하늘은 회색빛이다. 그래서 인지 아예 하늘을 올려다 볼 생각조차 않고 산 지 꽤 오래 된 것 같다. 그러다가도 가끔 비가 내린 다음 날이면 하늘을 본다. 어릴 적 하얀 도화지에 하늘색 크레파스로 열심히 문질러 메우던 파란하늘에 목화솜을 뽑아 박아 놓은 듯 뭉게구름까지 두둥실 떠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은 어린 시절로 줄달음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은 아니었어도 집 가까이에 벚나무도 있었고 저만치 떨어진 뉘 집 담장 옆엔 살구나무도 있었다. 장마 무렵이면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높다란 나무에 달려있던 노랗게 익은 살구가 간밤에 몰아친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여기 저기서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줍느라 신바람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던 벚나무는 두 세 명의 아이들이 양 팔을 벌려 감싸 안아야 할 정도여서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 밑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지금처럼 예쁜 모양과 알록달록한 색상을 갖춘 놀이기구는 없었어도 원숭이처럼 나무에 올라 입안이 보랏빛이 되도록 버찌도 따 먹고 타잔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며 마냥 행복해 했었다.

 

아파트 단지와 진입로에 있는 잘 다듬어진 벚나무는 그저 계절이 오고 감을 느끼게 할 뿐 동심을 자아내기엔 부족했다. 그런데 달포 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원에 들러 집에 오는 길에 운동삼아 걷기로 했다.  

 

a

따가운 불볕 아래 단풍처럼 울긋불긋 익어가는 버찌 ⓒ 김정애

따가운 불볕 아래 단풍처럼 울긋불긋 익어가는 버찌 ⓒ 김정애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된지라 실로 오랜만에 가져 보는 여유였다. 그래서 시끄러운 대로를 피해 한산한 이면도로를 택했다. 걷다보니 저 만치에 있는 가로수 잎 사이 사이로 점점이 노란색이 눈에 띈다. "저게 뭘까~?" 호기심에 걸음을 재촉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어릴 때 보았던 살구가 아닌가~! "세상에라~  살구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있었네~" 한두 그루도 아니고 도로 양 옆에 사열을 하듯 일정 간격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게 아닌가.  

 

너무 신기해서 뭣에 홀린 듯 감탄사를 연발하며 강열한 햇볕의 따가움도 잊은 채 부신 눈을 찡그리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와~~~~~~ 빛깔도 고와라~ 정말 혼자보기 아깝네~" 갓 세수를 한듯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오렌지 빛깔의 살구가 애기 볼처럼 맑고 곱다. 또 뭐가 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무마다 올려다보며 걸었다.   

 

어느새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도착했다. 제법 큰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길손의 발길을 잡는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콩알보다도 작은 열매가 단풍처럼 울긋불긋한 색깔로 영글어 가고 있었다. 옆 나무엔 언뜻보면 개구리 알 같이 까맣게 익은 것들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a

언뜻보면 영락없는 수초사이에 개구리 알 같은 까맣게 익은 버찌 ⓒ 김정애

언뜻보면 영락없는 수초사이에 개구리 알 같은 까맣게 익은 버찌 ⓒ 김정애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올려다 보다가 손이 닿을 만큼 늘어진 가지에서 까맣게 익은 몇 알을 따 입에 넣고 터뜨려 본다.  단맛보다 쓴맛이 더한 것을 보니 개버찌인가보다. 어릴 땐 쓴맛을 느끼는 순간 뱉어버렸는데….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하찮았던 작은 것들마저도 그리움이 된다. "늘 삭막하다고만 느꼈는데 도심 속 자연은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자 이렇게 가까이에서 손짓하고 있었구나." 

 

"이젠 가끔 하늘도 올려다보고 우뚝 우뚝 솟아있는 빌딩 숲 사이의 자연과도 친구가 되어 눈 맞춤을 해 줘야겠다."  모처럼의 여유가 가져다 준 여름날의 잔잔한 행복이었다.

2008.08.06 18:00 ⓒ 2008 OhmyNews
#벚나무 #살구나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안녕하십니까~?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52세 주부입니다. 아직은 다듬어진 글이 아니라 여러분께 내놓기가 쑥스럽지만 좀 더 갈고 닦아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들 수 있는 혼이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특히 사는이야기나 인물 여행정보에 대한 글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길 희망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구순 넘긴 시아버지와 외식... 이게 신기한 일인가요?
  2. 2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대전 유흥주점 간 정준호 집행위원장
  3. 3 '윤석열 대통령 태도가...' KBS와 MBC의 엇갈린 평가
  4. 4 청보리와 작약꽃을 한번에, 여기로 가세요
  5. 5 5년 뒤에도 포스코가 한국에 있을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