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월간 '작은책'이 87년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을 맞아 기획한 강좌 '작은책 스타'를 책으로 엮었다.
철수와 영희
아내와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온 뒤 집에 와서 며칠 지난 <한겨레>를 펼쳤다. 오잉? 이게 뭐야? '국방부 '홍보' 덕분에… '불온서적' 판매 불티 나네'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불온서적? 별 웃기는 짬뽕들이 다 있군. '잃어버린 10년'이니 어쩌구 하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나 보다.
기사를 읽어봤다. 대중성 높은 인문교양서와 수십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까지 불온서적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다섯 배에서 일곱 배가 더 팔린다는 소식이다. 그 기사엔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이 불온서적으로 선정됐다고 나와 있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은 나도 샀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다. 무척 많이 팔린 책으로 알고 있는데 불온서적이라고? 정부 하는 짓들이 하도 그러니까 무덤덤하다.
그런가 보다 하고 월요일치 신문을 들췄는데 어라? '우석훈·진중권 등, 국방부 조처에 익살·조롱'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기사에 정태인 선생 이름이 나온다. 정태인 교수가 지난 2일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올린 글에 "(여러 사람과 함께 쓴)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책도 불온서적 목록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아무래도 제목의 선정성이 선정 기준이었던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어랏, 전화를 끊어? 내 집요함을 모르는군<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책은 <작은책> 12주년 기념으로 내가 강연을 기획해서 정태인·홍세화·하종강·이임하·박준성 선생이 강연한 내용을 '철수와 영희' 출판사에서 책으로 펴낸 것이다. 강연한 사람 가운데 나도 물론 포함돼 있다. 그런데 그 책이 불온서적 목록에 들어갔다고? 천박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온하다는 말을 들으니 이거 참 영광(?)이군 하면서도 은근히 열 받는다. 역사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에게 재단을 당하다니.
그런데 '불온'이라는 말이 뭘까?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온당하지 않음'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일부 명사 앞에 쓰여)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이라는 뜻이란다. 아하, 그러니까 내용은 둘째치고 자기들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불온한 거군.
8월 6일 휴가가 끝나고 회사로 나와 국방부 민원실에 전화를 했다. 내가 누구인지 자세히 밝히고 그 책이 불온서적 선정이 된 기준이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담당하는 부서 바꿔 드릴게요" 하면서 정보 본부 보안과라는 곳으로 전화를 돌려준다.
"보안과 김○○입니다." "김 뭐라고요?" 나는 이름을 먼저 알고 싶어서 물었더니 대답은 안 하고 누구냐고 묻는다. 다시 설명했다.
"이번에 국방부에서 불온서적 목록을 발표했는데 그 책 가운데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를 쓴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안, 건, 모입니다. 실례지만 전화받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죠?""아, 김 서기관이라고 아시면 됩니다."그리고 이어 하는 말이 그런 건 민원실을 통해서 하란다.
"민원실을 통해서 거기를 바꿔준 겁니다. 전 단 한 가지, 불온서적 선정 기준이 뭔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거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아, 그 내용 홈페이지에 다 나와있어요.""내가 지금 국방부 홈페이지를 열어놓고 있는데 어디에 나와 있지요?""아, 제가 확인을 못했습니다.""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건 확실한가요?""그건 잘 모르고 대변인실에 확인을 한번 해 보세요.""거기가 담당 부서라면서요?""아, 저는 책임자가 아니라 실무자라서 잘 몰라요. 그리고 제가 지금 회의를 가야되거든요. 죄송한데 전화 끊겠습니다."삐, 삐, 삐! 소리가 들렸다. 어? 전화를 끊어? 이 사람이 내가 얼마나 집요한지 모르는군. 다시 민원실로 전화를 했다. 이번엔 대변인실을 바꿔 달라고 했다.
다시 아까와 똑같이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건 정보본부 보안과가 담당이라고 했다.
"거기서 대변인실로 전화하라고 해서 거기로 한 겁니다.""아, 죄송합니다. 아마 직원분이 아니라서 잘 모르고 그랬나 봅니다."아니, 직원이 아닌 사람이 왜 전화를 받아? 우리나라 국방부가 이 정도야? 불온서적 선정보다 내부 직원 선정이나 잘해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집요하게 물었다. 그랬더니 두 시간 안에 다시 전화를 드릴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도 전화가 안 온다. 세 시간이 넘었다.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공보 담당이라는 곳으로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돌릴 테니 혹시 끊어지면 748-67○○로 다시 하세요."돌린다더니 삐, 삐, 삐 소리가 들린다. 다시 전화를 돌렸다. 똑같은 내 소개를 하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화 받은 곳은 문화부란다.
"이리로 하시면 안 돼요. 여긴 문화부입니다. 748-23○○으로 하세요""전화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네요. 속이는 거 같아 영 기분이 안 좋네요"'지금 장난하는 거야?' 하는 말 대신에 부드럽게 말했다. 나이 드니까 성질 많이 죽었다. 역시 전화를 돌려준다고 하더니 삐, 삐, 삐 소리가 들려 온다. 또 전화를 끊었다. 허 이것 봐라. 일부러 그러는 거야, 시스템이 엿 같아서 그런 거야? 국방부 시스템이 이 정도야? 이래 가지고 나라 지키겠냐? 오기가 생긴다. 우리나라를 지키려면 내가 포기하면 안 될 듯 싶다. 다시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네, 죄송합니다. 담당자가 전화 통화중이라서 좀 이따 하세요. 아, 잠깐만요. 전화 통화가 끝났네요. 바꿔 드릴게요"전체적으로는 문제 없고,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도 알 수 없고드디어 보안정책과장이라는 사람과 통화가 됐다. 이름을 알고 싶어서 물었지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켕기는 게 있나? 왜 자기 이름을 떳떳이 밝히지 못할까. 다시 내 소개를 하고 불온도서 선정 기준을 물었다. 열심히 설명을 한다.
"우리 군대에 세 가지 정도 근거가 있는데요. 대통령령으로 정한 군인 복무 규율이 있고 국방부 훈령으로 나온 병영생활 규정이 있는데요……."그러면서 '허가되지 않은 불온서적물은 반입을 금지하고 불온 표현물 소지와 전파를 할 수 없고 취득시에는 신고를 해야 하고 국방부 훈령으로 된 군사보안업무시행규칙에는 부대에 반입·반출하는 모든 자료는 부서장이 보안상 검토를 실시하고…….' 한참 설명하기에 잠자코 들었다.
"네, 그건 알겠습니다. 당연히 부대에 그런 규칙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라는 책이 불온서적 목록에 올랐죠? 그 기준이 뭐죠?"결국 정책과장이라는 사람은 그 선정 기준을 말했다.
"그 기준이라는 게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에서 군대에 도서보내기 운동을 한 책을 기준으로 한 겁니다.""이적단체요? 한총련을 말하나요?"나는 한총련이 이적단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들은 말이 있어서 넘겨짚었다.
"그것도 포함합니다. 엄연히 93년도에 이적단체로 법원에서 판결이 났죠. 그런 책들이 장병들의 정신·전력을 약화, 저하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판단해서 불온서적 목록으로 선정한 거죠. 어느 부분이 그렇냐고 물으면, 그것이 몇페이지 몇줄에 나와있는 게 아니고…….""<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는 왜 불온서적 목록에 올랐죠?""그게 전체로 보면 문제가 없습니다. 한두 줄 문장에 그런 게 나오죠."아니, 금방 몇 페이지 몇 줄에 나와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이번에 한두 줄 문장이 그렇단다. 이랬다 저랬다 도대체 논리가 없다. 말이 바뀌는 것도 우습지만 책을 전체로 봐야지 한두 줄 문장으로 판단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