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필화, 어느 것이 더 클까?

[역사소설 소현세자 84] 협박에 굴복한 비서실장

등록 2008.08.10 15:39수정 2008.08.13 11:17
0
원고료로 응원
a

연적. 소나무와 매화가 그려져 있는 백자 연적(15~16세기). 조선 중기 선비들의 애장품이었다. 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용골대

영의정 홍서봉으로부터 김상헌이라는 단서를 끌어낸 용골대가 도승지 신득연을 불렀다. 각각 별도 수용되어 있던 신득연은 심문 진행상황을 모른 채 의주관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알사가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쩔렁거리며 의자에 앉혔다. 용골대 좌우에 구렛나루가 시커먼 불곰 같은 장수가 앉아있고 알사가 차렷 자세로 도열했다.


“보군과 수군을 징발 할 때와 원손이 들어갈 당시 횡의를 주장한 사람이 누구냐?”

“육군 조발과 원손이 들어갈 때 나는 심양에 있었으므로 그 당시의 일은 모르오.”
신득연은 세자 빈객으로 소현과 심양에 있었다.

“그럼, 이번 주사 징발에 반대한 사람은 누구냐?”
“모릅니다.”

이럴 때는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이 최고라는 것을 심양에서 터득한 신득연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였지만 실내는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사냥감을 앞에 놓은 포식자처럼 눈동자를 굴리던 용골대가 입을 열었다.

“횡의를 주장한 자를 이제야 알겠다. 모든 일을 국왕의 측근에서 받들어 시행하지 않은 도승지의 소행이구나. 이봐라 알사는 뭐하고 있는 게냐?”


지레 겁먹은 비서실장, 무릎을 꺾다

용골대의 고함소리에 신득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군량미 돌려막기 사건을 용장이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은화 천 냥을 내어 운반비로 쓰자고 한 계책이 탄로날까봐 의주에 당도하기 전 홍서봉 일행 대오에서 이탈하여 한성으로 돌아가다가 조정의 설득으로 의주에 도착했었다. 좌우에 시위하고 있던 알사들이 부동자세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의자에 앉아있던 신득연이 덥석 바닥에 무릎을 꺾었다.

“일없다. 이자를...”
용골대의 시선이 알사에게 옮겨갔다. “묶어라” 하면 묶이는 몸이 된다. 용골대 발치에 엎드려 있던 신득연이 역관 정명수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옮겨갔다.

“살 수 있는 방도를 일러 주시오.”

“횡의를 주장한 자를 모두 써내면 살 수 있을 것이다.”

a

붓과 벼루. 추사 김정희가 사용하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회심의 미소를 짓던 정명수가 신득연에게 지필묵을 내밀었다. 붓을 잡은 신득연의 안색은 창백했고 손은 떨렸다.

“육군을 징발할 때, 최명길이 심양에 가서 죄를 받을테니 파병을 유보하자는 말을 했고 수군 조발과 원손이 갈 적에는 김상헌과 조한영, 함창유생 채이항이 상소하였습니다.”

다 써 내린 신득연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었고 몸은 땀으로 후줄근했다. “말은 선비의 정신이고 글은 선비의 영혼이다” 라고 가르침을 주시던 할아버지 신중엄이 노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글은 칼보다 위험하다. 함부로 쓰면 네가 다치고 남을 다치게 한다

“글은 칼보다 위험하다. 함부로 쓰면 네가 다치고 남을 다치게 한다. 네가 다치는 한이 있어도 남을 다치게 하지 마라. 네가 다치지 않으려고 남을 다치게 하면 결국 너도 다치고 가문을 다치게 한다.”

선대에서 대사헌을 지냈던 아버지 신식(申湜)의 유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뼈에 새겨둔 유훈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떠한 파란이 밀려올지 모른다. 피할 수 없다.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 눈을 감았다. 노도와 같은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명수가 진술서를 용골대에게 전했다.

“김상헌은 이미 불러오도록 했다.”

용골대의 말을 듣는 순간, 신득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헌을 자신이 최초로 거론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미 호출하였다니 무거운 짐을 벗은 것만 같았다.

“조한영과 채이항을 급히 불러 오도록 하라.”

수군 파병을 반대하고 원손 심양 행 철회를 극언한 지평 조한영과 청나라에 대적하자고 주장했던 함창유생 채이항의 호출령이 떨어졌다.

의주관을 물러나온 신득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숙소를 찾아간다는 것이 의주부윤 관사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격리수용이 해제된 홍서봉과 윤휘가 근심어린 얼굴로 안절부절 서성이고 있었다.

“고생 했소 도승지! 그래 용장이 뭐라 묻던가요?”
용골대와 신득연의 면대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홍서봉이 귀를 쫑긋 세웠다.

“횡의를 주장한 사람이 누구냐고 캐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나왔소?”

“횡의를 주장한자가 김상헌이라고 영상대감이 말하는데 맞으면 쓰라며 붓을 내놓기에 마지못해 써주고 나왔습니다.”

조직력이 와해된 수비진영, 책임 전가하기에 급급

신득연의 말을 듣는 순간 홍서봉은 망연자실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태풍이 불어오는 일만 남았다. 홍서봉이 한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잘못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신득연이 부리나케 관아를 빠져나갔다. 자신의 숙소에 도착한 신득연은 급히 붓을 잡아 조정에 장계를 띄웠다.

“횡의를 주장한 사람을 물어 당시 나는 심양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라고 극력 변명했으나 무위에 그쳤습니다. 아무리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된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기에 부득이 최명길, 김상헌, 조한영, 채이항을 써주었습니다. 신이 본래 화친을 주장한 사람이었음을 보장하고 속죄해 달라고 하면 신이 구제될 가망이 있습니다.”

신득연과 헤어진 홍서봉도 급히 장계를 올렸다.

“신득연이 횡설수설하는 것이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습니다. 저들이 추궁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레 겁을 먹고 명단을 써주어 자신의 죄가 감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김상헌에 대해서는 신이 분명히 변명하지는 못하였지만 역관들을 시켜서 ‘그가 노환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조정에 죄를 얻어 직책이 없다’고 말하게 해서 이런 내용이 용장의 귀에 익숙하게 된 뒤에 기회를 보아 잘 설득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득연이 명단을 적어 준 이후로는 다시 힘을 써볼 바탕이 없습니다.”

청나라의 간접침략을 일치단결하여 격퇴해야 할 대신들의 조직력이 와해됐다. 용골대의 노림수다.
#필화 #서화 #지필묵 #신득연 #홍서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사 탄핵' 막은 헌법재판소 결정, 분노 넘어 환멸
  2. 2 택배 상자에 제비집? 이런 건 처음 봤습니다
  3. 3 서울 사는 '베이비부머', 노후엔 여기로 간답니다
  4. 4 나이 들면 어디서 살까... 60, 70대가 이구동성으로 외친 것
  5. 5 윤 대통령 최저 지지율... 조중동도 돌아서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