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8.08.11 13:43수정 2008.08.11 13:43
산 잡지 <월간 마운틴> 기자였던, 지금은 진업주부인 김선미 씨가 최근 <바람과 별의 집>이라는 여행 에세이집을 출판했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김선미씨를 알지 못한다. 그저 그의 책 날개에 적힌 이력을 본 것뿐이다.
김선미 씨의 이 책에는 자신의 두 딸과 함께 전국을 여행하며 야영생활을 한 열두 달의 기록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 상강(霜降) 무렵(김씨는 24절기를 따라 절기에 맞는 여행지를 골라 다닌 듯하다) 포천의 명성산 자락에 캠프를 친 이야기가 내 눈을 끌었다. 내가 이 글이 특히 반가웠던 건 김씨 가족이 캠핑을 했던 그 곳이 지금 김홍성 시인이 살고 있는 ‘산정호수 B캠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인가 초여름 쯤, 가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김홍성 시인이 사는 산정호수 상류의 산안마을을 찾아갔다. 이 때 나는 산정호수와 인연을 맺었다. 김홍성 시인은 네팔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지난 2007년 일시 귀국한 후 현재는 네팔과 한국을 오가며 글을 쓰고 있다.
왕건에 쫓긴 궁예가 숨어든 명성산
김선미 씨가 말한 대로 산정호수와 명성산은 사실 입김이 호호 나고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을 때가 제격이다. 서리 이불을 하얗게 덮은 낙엽을 밟아가면서 연인이, 혹은 부부가 새벽의 산정호수 길을 걷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물론 주말이나 휴일의 산정호수는 그저 떠들썩한 유원지에 다름 아니다. 특히 명성산 억새꽃축제가 열리는 매년 가을(10월 중순 쯤)이면 ‘바람과 별의 집’의 표현처럼 산 위에는 산에 살고 있는 동물(곤충을 포함한)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번잡하다.
그러나 산정호수와 명성산은 고즈넉하면 고즈넉한 대로, 시끌벅적하면 시끌벅적한 대로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라면 매표소와 가까운 선착장에서 오리보트를 타보는 것도 좋고, 옆에 있는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부부나 연인들이라면 매표소 옆길을 따라 난 명성산 등산코스를 오르는 게 좋다.
왕건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쫓긴 궁예와 그 백성들이 이 산에서 구슬피 울었다 해서 이름 붙은 명성산. ‘울음산’ 명성산 등산로는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한 30분 정도 걸리는 등룡폭포까지만 올라도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든다. 산을 오르다가 문득 돌아보면 저 멀리 발아래로 산정호수의 수면이 파랗게 펼쳐진다. 저절로 감탄이 날 정도로 시원한 광경이다.
나는 지난해 초여름부터 10월초까지 꽤 여러 번 산정호수를 찾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네팔을 다녀온 후 겨울에도 몇 차례, 그리고 올봄에도 서너 번 산정호수와 명성산 자락을 찾았다. 산과 호수는 늘 같은 모습인 듯해도 내가 갈 때마다 표정이 달랐다.
산과 호수가 파랗게 쨍쨍해서 나까지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고, 반면에 산중턱에서 천둥번개를 만나 쫄딱 비 맞은 생쥐 꼴로 쫓기듯 호숫가 카페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어느 늦은 가을 아침의 산정호수는 뽀얗게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신비주의자처럼 굴기도 했고, 그때 상류 산안마을의 키 큰 잣나무 옆 청솔모는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산정호수의 맛집 ‘국숫집 베네치아’
사실 나는 명성산 정상까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 번'이라고 생각만 하다가 꼬박 사계절을 산 주위에서 맴돈 셈이다. 봄에는 아직 날이 덜 풀려서, 여름엔 너무 더워서, 가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번잡해서, 겨울에는 얼어 죽을까봐(?) 명성산을 오르지 않았다. 물론 핑계다. 사실은 호수 가에 갈 때마다 만나는 사람과의 인연, 그리고 그 정이 산에 오르려는 내 발목을 잡았다.
김홍성 씨 덕분에 호수 상류에 있는 국숫집 겸 카페 '베네치아'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