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세요 아저씨, 패랭이에요"

[북한강 이야기 305] 어쩔거나, 소녀를 닮은 패랭이꽃

등록 2008.08.12 18:11수정 2008.08.1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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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은 민초이다. ⓒ 윤희경


땡볕이다. 불볕더위 속 하도 덥다보니 시원해야할 매미 소리마저 짜증스럽고 시끄럽기 짝이 없다. 밭둑에 앉아 숨을 고르고 땀을 씻어 내리다 작달막한 들꽃 한 송이를 내려다본다.


비옥한 땅과 넓은 들을 마다하고 각박하고 모진 곳에만 피어나는 들꽃이 있다. 패랭이 꽃이다. 패랭이꽃은 나름대로의 깐깐한 철학과 고집을 갖고 불모지에서 뿌리를 내린다. 건조한 모래땅, 돌서덜밭, 바닷가 짠바람을 골라 다니며 대나무처럼 꿋꿋하게 피어나 석죽화(石竹花)란 이름을 얻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피어나면 갯패랭이, 높은 산에 피면 난쟁이패랭이, 산골짝에서 피는 석죽을 술패랭이 또는 구름패랭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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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빛 패랭이꽃 테두리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 윤희경


패랭이란 댓개비(대를 잘게 쪼개 깎은 꼬챙이)로 만든 모자이다. 양반들은 정장을 할 때 갓을 쓰고 의관을 차리지만, 천민들은 패랭이로 정장을 갖추었다. 상민, 역졸, 보부상 등 가난한 하층민들이 즐겨 쓰던 의관이라면 어떨까 싶다.

꽃을 뒤집어 보면 영락없이 패랭이를 닮은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패랭이 모습이 긴가민가해 아리송하다면 지금이라도 패랭이꽃을 뒤집어보면 금세 궁금증이 풀린다.

유럽의 카네이션은 꽃보다는 '멜랑콜리 워터(憂鬱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꽃을 설탕에 재 짜낸 주스를 우울수라 하여 노이로제처럼 병이 깊어졌을 때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다. 카네이션이 여자들의 우울증을 달래주는 약수라 하여 '마리아수'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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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새가 파드득 날개짓, 천상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 윤희경


우리나라의 야생 카네이션이 석죽화 또는 패랭이꽃이다. 패랭이꽃은 스스로 요염한 양귀비꽃이거나 화사한 철쭉이기를 거부하고, 청초한 백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직 역경과 고단한 자리에서만 피기를 고집하는 들꽃으로 만족한다.

세상 사람들은 붉은 목단을 사랑하여 집 뜰 가득 심어놓고 살면서
누구라 거친 초야(草野) 돌 모래땅만 찾아 피는
석죽화 있음을 알랴
땅이 누추하니 귀한 이 찾을 이 없어
그 아름다움과 꽃 뜻을
전야부인(田夫野人)이나 산처야첩(山妻野妾)만이 독차지하는구나
- 고려의종 한림학사 정습명 '석죽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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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다. ⓒ 윤희경


패랭이꽃은 뜨거운 여름을 매가리 없이 할딱거리며 넘어가는 촌부들을 그대로 닮은 꽃이다. 가진 자들은 더위가 무색하리만큼 입만 열면 배추 색 다발 속에서 술래잡기를 하지만, 민초들은 돌밭 속에서 무더운 땀방울을 훔쳐내고 있다.

구름 아래 한층 눈이 부신 구름패랭이꽃, 흰 새 한 마리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고 있다. 여린 날갯짓이 파득일 때마다 하얀 바람이 일고 땀방울이 송알송알 콧등을 타고 내린다.

꽃말이 '순결한 사랑'이란다. '서두르세요, 아저씨.' 꽃 향이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진다며 가까이 오라 손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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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 그 향기는 깜빡할 사이 곁을 떠난다. ⓒ 윤희경


패랭이꽃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일으켜 세우는 한숨 같은 꽃이다. 척박한 속에서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어린짐승이다. 꽃 문을 열면 작은 소녀가 치마를 펼치고 수줍은 얼굴로 귓속을 간질이는 앙증맞은 꽃이다. 자줏빛 테두리가 둥글게 꽃술을 놓기 시작하면 아직도 가슴이 뛰어오르는 패랭이꽃. 아, 어쩔거나 소녀를 닮은 작은 패랭이꽃.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윤희경 수필방을 방문하시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윤희경 수필방을 방문하시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패랭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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