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동전 하나에 40분 토론하다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 해 편 12 - 쿠바 ⑫] 상크티스피리(Sancti Spiritus)

등록 2008.09.07 10:27수정 2008.09.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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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다드 풍경 트리니다드 혁명 역사박물관(Museo Nacional de la Lucha contra Bandidos) 종탑에 올라가서 바라본 풍경. 마치 전주 한옥마을처럼 옛스러움을 잘 간직한 지붕들이 인상적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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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컬? 더워서! ⓒ 문종성



"자자, 이제 그만 끝냅시다. 여기요."


답답한 나는 여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우리의 계산은 이걸로 깔끔하게 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J와 또 다른 남자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상식과 관례가 충돌한 것이다.

상식은 관례를 이해하지 못했고, 관례는 상식을 이해하지 않았다. 점점 지루해질 때 난 먼저 논쟁의 장을 벗어났다. 여주인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멀찌감치 벗어나 느긋하게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둘은 그 자리에서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무려 동전 하나 때문에.

1CUC는 25페소인데 0.25페소는 5페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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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토론 사실 여행자에게 숫자가 미치는 파급은 막대하다. ⓒ 문종성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우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도로에 단 하나뿐인 식당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2페소짜리 미니 햄버거 6개와 콜라 2캔을 시켰다. 불결한 위생 상태인데다가 퍽퍽한 패티로 인해 참으로 고약하기 그지없는 맛이었지만 다시 힘을 내려면 무조건 먹어야 했다. 콜라의 당을 빌어 겨우 다 먹고 계산하려고 했는데 마침 현지 페소가 부족했다.

비용은 32페소가 청구됐다. 우리는 현지화폐가 없었으므로 다른 쿠바 통화인 CUC를 내밀었다. 계산하고 거슬러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환율인 1CUC를 24(대부분 24페소를 적용하지만 일부에선 23·25페소로 적용하기도 한다) 페소로 적용해 1CUC 한 장(24페소)과 0.25CUC짜리 동전(6페소)과 나머지 2페소 동전을 가게 주인에게 건넸다.


우리 계산으론 딱 32페소니 마무리짓고 떠날 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보던 가게 주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0.25짜리 CUC 동전의 가치 즉 환전액은 5페소라는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1CUC의 가치를 물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25페소란다.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다음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하지만 0.25CUC는 5페소예요."

난 처음에 그녀가 실수한 줄 알았다. 그래서 "계산이 잘못되었다, 0.25CUC를 4번 곱하면 20페소가 나온다"고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걸 안단다.

"우리 가게에서는 1CUC를 25페소로 적용 시킵니다. 그런데 0.25CUC는 5페소입니다."

참 난감한 계산법이었다. '우째, 이런 일이.' 처음 우리는 그 계산법이 상식적으로 옳지 않음을 설명하며 다시 한 번 계산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정 안 되겠거든 CUC로 계산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쿠바에서도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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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키알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성당(Parroquial de la Santisima)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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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가게 내다파는 물건은 적을지 모르나 퍼주는 인심은 푸짐하다. ⓒ 문종성



우리가 여주인과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사이 한 남자가 오더니 화제 속으로 끼어들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당연히 그가 우리 편이 될 줄 알고 성급히 질문했다.

"봐요, 이상하죠? 1CUC가 25페소라는데 그럼 0.25CUC가 6.25페소여야지 5페소면 잘못된 거 맞죠?"
"아니요, 당신들이 틀렸소. 1CUC가 25페소인 건 맞소만 0.25CUC는 5페소로 계산하오. 그게 여기 법칙이오."

그래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뭔가 조율을 할 것처럼 개입하던 남자의 말은 오히려 당당하게 여주인 편을 들어주었다. 지금까지 쿠바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희한한 법칙은 또 처음 봤다. 정말로 여기 법칙인지 외국인이라 생떼를 쓰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들의 말인즉 지폐는 규정대로 환전하지만 동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순간 머리가 받아들이질 못했다. 차라리 햄버거값을 몇 페소씩 더 올려받는다면 모르겠는데 수학적 상식을 완전히 깨버리는 그들의 관례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 때부터 설전이 오고 갔다. J는 아예 종이와 펜을 가지고 계산과 함께 이 숫자가 의미하는 부당성을 설명했고, 남자는 그런 전개를 모두 무시한 채 손 한번 내어저으면서 반대 의견만 표출했다. 그 때부터 나와 여주인은 끝도 없을 것만 같은 두 남자의 논쟁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돈 계산은 나와 여주인이 하는데 서로의 대리인이 나선 것이다. 둘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며 똑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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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스런 목각인형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쿠바의 국민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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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투어 당나귀도, 당나귀로 푼돈을 손에 쥐는 할아버지도 고생이다 싶다. ⓒ 문종성


이 때 내가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CUC를 살짝 더 얹어 줄 테니 이쯤에서 계산을 그만 끝내자고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 가게에서는 CUC를 취급하지 않아요. 오직 페소로만 계산해요."

황당했다. CUC를 받지 않는다니. 그럼, 지금까지 왜 그런 상황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했단 말인가?

아, 답답한지고! 쿠바의 정책으로 CUC가 빠른 속도로 경제생활에 관여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도시나 시골 마을에서는 CUC를 취급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 그리고 여긴 도로 위에 허름한 가게. CUC를 사용할 만한 장점도 없고, 거점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페소가 없는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눈치를 봐가며 적당히 3CUC짜리 지폐를 건네고 알아서 거스름돈을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내 딴엔 둘의 논쟁 사이를 멋있게 뚫고 자신있게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여주인에게 주는데, "거스름돈이 없다니까요"한다. CUC로 계산하지 않아서인지 아예 잔돈조차도 없단다. 무조건 페소로 달란다. 자기들 계산법으로 말이다. 뭔가 꼬여도 한참 꼬였다.

시간이 흘러도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 쪽 계산대로 더 내란다. 가끔 그의 비협조적인 태도나 말투가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처럼 보여 살짝 못마땅했다. 지칠 만도 한데 J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고집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끝까지 논쟁하는 두 사람을 두고 나와 여주인은 뒤에서 따로 극적으로 합의했다.

내가 제시한 금액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계산은 극적으로 끝났다. CUC로 받는 대신 액면가보다 살짝 더 얹어준 것이었다. 여자는 언제 우리가 의견 차이가 있었냐는 듯 고맙다며 받았고, 나 역시 복잡하게 엮인 일을 한 번에 풀어준 마음에 고맙다고 답했다.

40분의 동전 토론, 잃은 것과 얻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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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orre de Manaca Isnaqa 스페인 식민 시대에 건축된 망루대. 원래 목적은 노예들의 탈출을 막기위한 감시 체계 역할을 위해 세워졌다. ⓒ 문종성

그러나 우리의 거래가 이미 종료된 시점에서도 두 남자는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다며 우기고 있었다.

나는 흥분할 때 스페인어가 얼마나 빠른지 잘 알고 있다.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한다. 그리고 절대 자신의 의견만 피력하지, 다른 사람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 스페인식 토론에서 중요한 건 내용의 논리가 아니라 얼마나 말을 크고 빠르게 그리고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때론 말하는 게 꼭 싸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 어안이 벙벙하기도 한다.

어쨌든 계산을 하고 나와 여주인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가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J를 기다렸다.

하지만 멀리서 보니 당최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햇살을 그대로 받으며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무슨 할 말들이 그리도 많은지…. 시계를 보니 처음 계산하려던 시간에서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장장 40분. 그때야 얘기를 끝냈는지 J가 성큼성큼 내게로 왔다.

정말 지독한 토론이었다. J는 쓱 웃으며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곤 꼬부랑 한국어로 한 마디 하는 것이다.

"형, 저 남자가 이제야 이해해 줬어요."

이미 우린 40분이란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겨우 얼마 가지고 참 소모적인 논쟁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런 일은 좀체 겪어보지 않았을 녀석이었기에 이처럼 적은 액수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도 몰랐다. J가 한 마디 한다.

"근데, 생각해 보니 좀 지나쳤던 거 같아요. 형, 제가 좀 많이 끌었죠?"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무는 게 후회하는 듯 보였다. 나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동시에 느꼈다.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마냥 옳은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아쉬움. 우리는 명백한 실수를 자인하고 있었다.

"내 말이. 그깟 얼마 그냥 다 줘버리자고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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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다드 상징 Iglesia y Convento de San Francisco 쿠바 동전 뒷면에 배경이 되는 트리니다드 마요르 광장 풍경. 보통 이곳을 기점으로 여행의 동선이 그려진다. ⓒ 문종성


그날 이후 우리는 동전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항상 팁을 준다는 생각으로 잔돈쯤은 유연하게 대처하며 가볍게 넘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그 작은 태도가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윤활유 역할을 했다. '그깟' 동전을 더 얹어줄 때마다 그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보다 더 큰 즐거움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상식적으론 손해인 것이 현실에서는 감정상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묘한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성립됐다.

가능하면 현지인의 농간에 빠지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도 보면 계산이 선 이익을 보겠다는 주변인 심보다. 내 가족, 내 친구라 생각했다면 하나 더 주고 하나 덜 받는 것도 기쁘고 즐거웠으리라. 그리고 그런 건 필연적으로 능동적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자전거 여행 초창기에 삶은 계산하는 것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건만 아직 밑그림만 그리는 수준이다.

이 여행에 아름답게 색을 칠할 때는 아직 멀었다. 좀 더 조화를 이뤄보자. 그들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바꿔보자. 비워낼수록 채워지는 동전 하나의 기쁨, 이젠 놓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살사 #트리니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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